이토 히로부미는 ‘온건’주의자이면서 ‘점진’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 이토는 책임 있는 자리에 앉으면서부터 늘 조심스럽게 정책을 다루어 나갔고 점진주의 노선을 택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만이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정치가였다. 동시에 그는 테러는 물론 살인도 서슴지 않는 과격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적절한 시기’가 왔다고 판단하면 누구보다도 극단적이고 급진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헤이그 사건’ 이후 이토가 취한 조치가 그의 이러한 일처리 스타일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토가 헤이그 사건의 내용을 처음으로 보고받은 것이 1907년 7월 3일이다. 그는 이 사건을 ‘보호정치’를 한 걸음 더 발전시키기에 ‘적절한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대한제국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고종을 협박하여 황제의 직을 양위케 하고(19일), 한국의 내치권을 장악하는 정미7조약을 조인하고(23일), 한국군대를 해산하고(31일), 그리고 한국의 내각과 통감부를 확대 개편하는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이는 이토가 결코 온건주의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모든 부서 차관을 일본인으로....'차관통치' 개시
통감부 권력 강화
전광석화와 같이 ‘헤이그 문제’를 처리한 이토는 한국지배를 위한 새로운 구상과 조치를 취했다.
먼저 한국의 내정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하여 통감부 권력을 확대하고 한국내각과의 관계를 신속히 재정비했다. 통감부에 부통감제를 신설하는 한편, 정미7조약을 근거로 한국 내각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했다. 8일 이토는 한국정부의 요직이라 할 수 있는 내무(木內重四郞), 농상공부(岡喜七郞), 학부(俵孫一), 탁지부(荒井賢太郞), 궁내부(小宮三保松), 법부(倉富勇三) 차관과, 경무총장(松井茂), 경시총감(丸山重俊), 총세무사서리(永濱盛三)에 일본인을 임명했다. 이들 모두는 통감부의 참여관으로 겸임하면서 한국정부와 통감부의 일을 겸하했다. 소위 ‘차관통치’의 시작이다. 이로써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가 실질적으로 일본인에 의하여 운영되게 되었다. 이름은 ‘한국대신회의’였지만 실은 일본인이 움직이는 회의였다.
"황태자를 일본 유학보내자"... 한국 황실부터 일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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