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의 영향
갑신정변의 실패는 조선 근대화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1.대중의 개화사상 불신요인 상승
2.개화파의 유혈극으로 국민들에게 국왕에대한 모독 그리고 청군에의해 도주당시 국왕을 내팽겨친 점등은 유교사상의근본인 국민들에게 불신의 가중이 점철
3. 보수 유생들의 “개화사상에 대한 배타심및 적개심고조 즉 보수세력에의한 동조세력규합실패
4. 개화파들에대한 국민적 분개 즉 역적으로 규탄.
5. 국왕및 관료들에의해 개화 사상 후퇴
6. 대한제국 초기에 개혁인사들을 일거에 손실
조선 국왕 이재황은 개화사상에 반감을 품게 되어 개화 운동을 멀리하게 되었다. 당시 정치에서 개혁이 성공하려면 국왕의 협조가 절대 필요하였다. 비록 왕권 행사에 제한이 있어도 이념적으로는 국왕이 절대 군주였으며 모든 국가의 권한은 그로부터 나왔다. 실제적으로 국왕의 승인 없이는 어떠한 중요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므로 개화당 인사들이 구상하는 개혁을 이루려면 고종의 지지가 있어야 했다.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이재황은 개화 운동에 동조하고 있었으며 개화파 인사들을 신뢰하고 있었다. 강화도 조약 이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설치나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이른바 ‘신사유람단’)의 일본 파견 등에는 이재황의 의지가 작용했다. 이 조사시찰단에서 홍영식․어윤중․유길준․이상재․윤치호 등 주요 개화파 인사가 나왔다.
김옥균이 기록한『甲申日錄』에도 이재황이 개화파를 신임한 것이 잘 드러난다. 여기에 따르면 정변이 나기 5일 전, 김옥균은 입궐하여 이재황이 왕비에게 당시의 청과 일본이 조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국제정세를 소상히 이야기하였다. 이때 이재황은 “그대의 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무릇 나라가 위급한 시기에 처하면 국가의 대계를 그대가 생각한 계획에 맡길 터이니 그대는 이에 대해 의심치 말라”고 하였고 김옥균의 요청에 따라 (勅)을 내리기까지 했다. 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뒤 정부에서 발표한「갑신변란사실」이라는 공식성명서에서도 “역당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 등은 (중략) 재기가 있고 화술에 능하고 또 외국 사정을 대략 알고 있다 해서 국왕이 그들을 총애하여 높은 벼슬을 주고 또 그들을 가깝게 신용하였다”라고 하여 이재황이 개화당 인사들을 신임하고 있던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유혈 정변을 일으킴에 따라 국왕의 신임이 깨어지고 이들에게 반감을 품게 됨에 따라 개화 운동에 가장 긴요한 동조자를 잃어버렸다.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개화파 인사들을 잃은 것이다. 정변 참가자 중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을 비롯하여 9명만이 일본으로 망명하였을 뿐 자의 또는 타의로 망명하지 못한 인사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홍영식의 집안은 부친을 비롯하여 그의 처자 및 형에 이르기까지 모두 음독자살하였다. 김옥균의 생모 송씨는 음독자살하였고, 생부 김병태는 천안 감옥에 10년간 구속되었다가 김옥균이 암살당한 1894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누이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음독자살을 기도했다가 실패, 거짓 장례식을 치르고 도망다니게 되었으며 남동생 김각균은 옥사했다. 서광범의 부친 서상익은 옥사했고 서재필의 부친 서산언과 처 이씨는 모두 자살했다. 거사 참여자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김옥균 등에게 처음으로 개화사상을 전파하고 ‘백의정승(白衣政丞)’ 으로 불리던 유대치(劉大致 ; 유홍기)는 정변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近世朝鮮政鑑』의 저자 박제경(朴齊絅)은 흥분한 민중에게 잡혀 수표교 위에서 참살당하였다.
개화파 인사들의 숙청으로 조선은 1894년 청일 전쟁이 나기까지 10년 동안을 우왕좌왕하며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었다.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목적의 하나는 청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막고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청의 조선에 대한 간섭은 더욱 노골적이고 강압적이 되었다.
갑신정변으로 일본공사관은 다시 소실되었다. 일본은 외무대신과 2개 대대의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여 사후 처리 교섭을 진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885년 1월 조선 측에서 1) 사죄의 국서를 발송하고, 2) 배상금 11만원을 지불하며, 3) 공사관 신축비 2만원을 지불한다는 내용의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 사태를 일단 수습하였다.
1885년 4월에는 이토오 히로부미가 천진으로 가서 이홍장과 회담하였다. 이홍장은 종속국의 내란에 청은 자유로이 출병할 권한을 있음을 강조하였다. 협상 결과 청과 일본은 4월 18일, 3개조로 구성된 간략한 내용의 천진조약을 체결하였다.
갑신정변 주요인물
김옥균
김옥균(金玉均, 1851년 ~ 1894년 12월 4일)은 구한말의 개화파이다.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
생애
6세 때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갔고, 1872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료로서 출세의 길이 열려 옥당승지·정언(正言)을 거쳐 호조참판을 지냈다. 박규수·유대치·오경석 등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1881년에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박정양, 홍영식등과 함께 일본을 시찰했고,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 당시 조선의 개화파들을 비롯한 아시아의 개혁파들에게 메이지유신으로 발전한 일본은 하나의 개혁의 본보기였기 때문이다. 김옥균은 동행하였던 이상재와도 교우를 쌓았고, 서재필 등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켰다.1882년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다가, 1883년 음력 3월 16일 동남개척사(東南開拓使)가 되어 포경(捕鯨) 업무를 겸하였다. [1] 1884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군인양성을 위한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신정부의 호조참판 겸 혜상공국 당상에 취임했으나, 갑신정변이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했고,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의탁하였다. 망명객 김옥균은 이와다(岩田周作)란 이름으로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한 후 1894년 이홍장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청나라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1894년 12월 4일 본국 정부에서 보낸 홍종우(洪鍾宇)라는 자객에게 권총으로 살해되었다.
유해가 조선으로 옮겨져 양화진에서 시체가 찢기는 극형에 처해졌으나, 1895년 갑오개혁으로 개화당 내각이 들어서자 법무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로 반역죄가 씻기고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박영효
박영효(朴泳孝, 1861년 ~ 1939년)는 조선 말기 급진 개화파의 주요 인물이며 일제 강점기의 친일 인물이다.
생애
본관은 반남(潘南). 노론의 실력자인 박원양(朴元陽)의 아들로 수원에서 태어났다.
1872년 4월 선왕 철종의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혼인하였으나 3개월만에 사별하고, 금릉위(錦陵尉)에 책봉되었다.
1870년대 중반, 형 박영교(朴泳敎)를 따라 재동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개화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1882년의 제물포조약에 따른 사과 사절로 일본에 다녀왔다. [2]이때 그가 대한민국의 국기 태극기의 원형이 되는 깃발 도안을 처음 그려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1882년 음력 12월 19일 한성부판윤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에서 접한 인력거를 한성부판윤 재임 기간 중 조선에 서둘러 보급했다. [3]
1883년 음력 3월 17일 광주부(廣州府) 유수로 발령을 받았다.[4]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1895년 갑오경장으로 사면되어 귀국했다. 그는 김홍집의 친일 내각에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여 개혁을 시도했으나 고종 양위 사건으로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7년 오랜 망명 끝에 귀국하여 사면을 받고,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와 매국공채 28만원을 받고,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일본 귀족원 의원(1932)과 조선식산은행 이사 등을 지내며 친일행위로 시종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한다. 1935년 5월 3일,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는 이우와 결혼하였다.
박영효에게는 여러 부인이 있었는데, 그 중 셋째 부인 범(范)씨와 사이에서는 2남 1녀를 두었다. 그 중 박흥원(朴興元)은 불가에 귀의해 서울 봉원사 주지로 있었으며, 흥원의 아들 혜륜(彗輪) 역시 승려이다. 범씨의 딸 묘옥(妙玉)은 인천의 부호 한갑현씨와 결혼하여 5남2녀를 두었다
그의 묘는 부산 사하구 다대동에 있었으나 그의 손자 박환범이 묘터를 팔고, 유골을 영혜옹주와 함께 화장하였다.
민영익
민영익 (閔泳翊, 1860년 - 1914년)은 조선 말기 민씨 외척 정권의 주요 인물이다. 본관은 여흥이다.
1883년 주한(駐韓) 미국 공사 푸트가 조선에 부임하자 보빙사(報聘使)의 정사가 되어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였다. 태평양을 건너고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미대륙을 횡단한 다음 뉴욕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 A. 아서와 회동하고 국서를 전하였다. 보스턴 등 각지를 순회하고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중도 개화파의 후원자였으며 1884년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감행할 때 가장 먼저 기습을 받아 중상을 입었으나 독일인 묄렌도르프에게 구출되어 미국인 의사 알렌에게 치료를 받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측의 권유로 주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로 일한 적도 있었다.
아버지: 민태호(閔台鎬, 1834년 - 1884년) / 양 아버지: 민승호(閔升鎬, 1830년 - 1874년)
민태호
민태호(閔台鎬, 1834년 - 1884년)는 조선 시대의 문신이다.
1882년 임오군란 때,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있었는데 민태호의 집도 습격을 받았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죽임을 당했다.
아버지: 민치오(閔致五)
양 아버지: 민치삼(閔致三)
양자(養子): 민영환(閔泳煥, 1861년 7월 2일 - 1905년 11월, 민겸호의 친자)
딸: 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 1872년- 1904년, 순종의 황후)
위안스카이(원새계)
위안스카이(袁世凱 Yuán Shìkǎi, 원세개, 1859년 8월 20일 ~ 1916년 6월 6일)는 허난 (河南)성 샹청(項城)현 출신으로 청나라 말기에서 신해혁명 직후까지 중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또한 조선과도 관계가 깊어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주재하면서 청나라 황제를 대신하여 내정 간섭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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