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힘들었던 답사
3년 전 동기들과 경기도 가평의 '아침고요수목원'과 양평의 '용문사'를 보고 올 계획을 세워 실행 중, 한 친구가 갑작스런 병이 나서 응급실로 실려가는 바람에 시간을 놓쳐 용문사 답사를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아쉬움이 남아서인지 '두물머리'(양수리)란 순수한 우리말이 멋지게 어울리는 곳, 양평에 대한 향수는 지울 수 없었다. 지난 해 문지회 답사계획을 세우면서 검색을 해보니 남양주시에 있는 다산 선생의 유적지를 끼우고 세미원이란 정원과 용문사를 보기로 작정하고 연꽃이 한창일 7월 29일로 답사 계획을 세웠다.
7월 27일, 중부지방의 폭우로 산사태가 나서 수 십명이 죽고 침수가 되어 교통이 통제되는 등 엄청난 재해를 만나게 되었고 회원들로 부터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겠느냐는 전화가 오기 시작한다. 저녁 7시가 넘어 양평군청에 문의하니 자기들도 비상근무 중인데 모레 상황을 알 수가 없단다. 세미원과 식당은 아예 전화가 불통이다. 사무처장과 의논한 뒤, 2주를 연기키로 결단을 내리고 메일과 문자로 급한대로 연락을 취했다.
연기했던 그 날이 바로 오늘인 것이다. 일기예보는 전국적으로 비가 오며 양평지방은 오전 중 흐리고 오후부터 최고 200mm가 넘는 폭우가 온다지 않는가. 또 염려하는 전화가 온다. 이제 더 미룰 수는 없고 일기예보는 어디까지나 당일 현지에 가봐야 맞는지를 알 수 있다는 신념으로 밀어부쳤다.
07시 반, 출발시각은 되었지만 77명밖에 오지 않았다. 그동안 새로 참석을 원하거나 불참을 통보하는 사람이 이어졌지만 어제까지 82명이 참가한다는 보고를 받고 그런대로 자위하고 있었는데 5명은 출발무렵에 불참을 통보하는 등 실망이 너무나 컸다.
다산유적지가 가까울수록 빗방울이 떨어진다. 준비한 우산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내리니 우산이 없어도 다닐만했다. 세미원과 용문사를 답사하는 동안 비는 전혀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귀로에 오르니 세찬 빗줄기가 퍼붓는다. 아! 우리 문지회를 위해 잠시 비를 멈추게 해 준 자연에게 엎드려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대구가 가까워질수록 땅은 포송포송한 흙을 드러내고 있었다 원거리이기도 하고 세 곳이나 둘러보는 무리가 있어 수박겉핥기가 된 듯 하지만 하루를 무척 바쁘게 무사히 보낸 것으로 만족하면서 이 글을 쓴다. 아마도 오랫동안 이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선생의 당호가 여유당이다>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747번길 11번에 자리한 생가 내부>
<생가 안채>
<안채 마루위에 걸린 액자>
<후손이 생가터임을 알리는 표석을 세웠다는데 국회의장 이름이 없다. 정일권인가?>
<묘소 앞의 비석>
<묘소를 내려오며 생가를 바라보다>
<묘소>
<여기서 풍산홍씨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다산 선생의 사당, 문도사란 현판이다. 문도는 그의 시호다>
<묘소 참배를 마치고 내려오는 회원들>
<다산 선생 상>
<항상 수고가 많으신 박성용 사무처장>
<다산 선생의 가르침을 분야별로 새겨 두었다>
<다산기념관의 거중기(우측)과 농로(좌측), 해설을 아래 사진으로 볼 수 있다>
<다산 선생이 학문에 몰두하는 모습>
<다산의 아버지는 부인 셋으로 부터 다섯 아들을 두었고, 다산은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 3남임을 알 수 있다>
<윤두서는 다산의 외 증조부다. 그의 어머니가 윤두서의 손녀다>
<해남 윤씨 종택 녹우당>
<도르레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데 사용한 녹로>
<녹로>
<거중기에 대한 설명>
<수원화성 축조에 큰 공을 남긴 다산선생>
<다산의 연보>
<생가터에 있는 멋쟁이 느티나무>
<다산박물관, 시간이 없어 둘러보지 못했다>
<야외에 전시한 거중기>
<다산 선생 저서탑. 일생동안 500권의 저서라, 감히 누가 그의 흉내라도 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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