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후 신익희의 정치활동


구경서<정치학박사/강남대학교>

 

1. 제헌국회, 광주에서 무투표 당선

  국가 수립의 기초가 다져지고 있었다. 한국 최초의 서구식 정치제도의 정치실험인 제헌국회의원 선거는 1948년 2월 6일 UN총회 한국위원회에서는 가능한 지역에 내에 한하여 선거를 실시하라는 유엔 소총회의 제안을 표결에 붙인 결과 4대 2, 기권 2로 이를 가결하였다. 그리고 이 권한을 UN한국위원단에 부여하고 이어서 선거법을 3월 22일자로 공포하였다.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적용된 국회의원선거법은 미군정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의하여 1947년 9월 3일에 공포된 남조선과도정부 법률 제5호 입법의원의원선거법(立法議院議員選擧法)을 골자로 하여 기초해 제정된 것이다. 이 선거법은 잠정적인 군정법령으로 대한민국 국회에서 국회의원선거법을 제정할 때까지만 유효하였다.1)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하여 1948년 3월 17일 미군정법령 제175호로 공포된 전문 57조의 국회의원 선거법의 주용 내용을 알아보자.2)


  첫째, 선거구는 선거구 법정주의에 의거하되, 각 선거구마다 1인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소선거구 다수대표제로 하여, 선거구의 획정은 부․군(府․郡) 및 서울시의 구(區)를 단위로 하여 인구 15만 미만은 1개구, 인구 15만 이상 25만 미만은 2개구, 인구 25만 이상 35만 미만은 3개구, 인구 35만 이상 45만 미만의 부(府)는 4개구로 하여 총 200개의 선거구를 획정한다.

  둘째, 국회의원 임기는 2년으로 한다.

  셋째,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았던자, 일본 제국의회의원이었던 자, 중추원 부의장․고문․참의원이었던 자, 부(府) 또는 도(道)의 자문이나 결의기관의 임원이었던 자, 고등관으로서 3등급 이상의 지위에 있었던 자, 판임관(判任官) 이상의 경찰관급, 헌병․헌병보이거나 고등경찰의 직에 있었던 자, 밀정행위를 한 자 등의 선거권을 제한한다.

  넷째, 선거인 명부는 선거구 선거거구관리위원회 위원장이 지정한 선거인 등록소에서 선거인의 자진등록에 의하여 작성하는 신고작성제를 채택하고, 선거권의 연령은 만21세로 한다.

  다섯째, 의원후보자는 선거인 명부에 등록한 자 200인 이상이 서명․날인한 추천장을 첨부하여 선거구 선거위원회에 등록하도록 하여 선거인추천제를 도입한다 등이 그 내용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현재의 선거법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행방 된 지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에 협력한 사람은 아예 피선거권을 박탈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국회의원 후보자들은 정치적으로 검증이 된 사람만 출마가 가능한 것이었다. 또 200인 이상의 유권자들로부터 추천을 받아야 하는 것도 새롭다.

  역사적인 선거는 1948년 5월 10일 실시되었다. 한반도 유사이래 처음으로 실시되는 역사적 선거이며 동시에 한국정치사에 이정표를 세우는 선거였다. 이보다 앞서 선거법상 3월 30일, 드디어 선거인 등록이 개시되었다. 등록이 개시되자 48개나 되는 정당과 사회 단체들은 선거 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선거운동에 돌입하였다. 선거일은 원래 5월 9일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5월 9일 오전 20분간의 금환 일시를 고려하여 5월 10일로 연기 확정하였다. 마침내 1948년 5월 10일, 유엔 감시 아래 실로 역사적인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공산당과 좌우통합파 등 총선거 자체를 거부하는 일부의 잡음이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선거의 4대 원칙, 즉 비밀선거, 보통선거, 평등선거, 직접선거 등에 의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제헌국회의원 선거 당시 입후보자는 모두 948명으로 이승만이 이끄는 대한독립촉성회가 235명을 출마시켰다. 그리고 언론계 출신과 자본가 계급, 일본 및 미국 등에서 해외 유학을 하고 돌아온 지식인 계층 등이 조직한 보수 우익정당인 한국민주당이 91명을 출전시켰다.3) 그리고 대동청년당이 87명, 조선민족청년단이 20명, 대한노동총연맹이 12명, 대한 독립촉성농촌연맹이 10명의 후보를 각각 추천했다. 이밖에 기타 사회단체 및 정당이 86명의 후보자를 내세웠으며, 무소속은 417명으로 전체 입후자의 44%를 차지하여 대거 출마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무소속이 이렇게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민주당 소속 후보자의 상당수가 한민당의 인기가 없어 무소속으로 나섰기 때문이다.4)

  이와 같은 상황은 당시의 정치적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다. 정당 및 단체가 무려 48개나 되었지만, 7명 이하의 후보를 추천한 정당이 42개나 되었다. 그리고 25개의 정당 및 사회단체는 단 1명의 후보를 추천하는데 그쳤다. 해방 후 정당과 사회단체의 난립현상과 함께 정치적 혼란을 여싱히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추진했던 남북협상파와 좌익계열은 이 선거에 불참하여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노정하였다.

  선거결과 무투표는 12명이었다. 그 가운데 신익희도 과거 독립운동의 공적과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아 고향인 광주에서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유권자들은 이른 아침부터 투표소 앞에 장사진을 이룬 한국정치사상 처음 실시되는 제헌국회의원 선거는 그 방법에 미숙한 점이 적지 않았지만, 전국유권자 7백 84만 여 명 가운데 1만 3천여 투표소에 전 유권자의 91%가 투표에 참가함으로써 놀라운 참여율로 민의는 성공적으로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입후자의 평균 경쟁률은 평균 8.3대 1이었다.

  투표율과 경쟁율이 이렇게 높은 것은 당시의 정치적 열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는데 그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헌국회의원 선거는 해방이후 처음으로 실시되는 선거라는 점에서 그동안 억눌려왔던 국민들의 심리에 잠재해 있던 정치적 욕구가 한꺼번에 노출되었다. 둘째, 국민 스스로가 자신이 주권을 갖고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의지가 투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로부터 나라를 잃은 슬픔과 수모를 겪은 국민으로서 이러한 의지는 당연한 것이었고, 이것이 제도적 장치를 통한 정치참여로 나타난 것이다. 즉, 국민들 자신의 의사에 의해서 국회를 구성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셋째, 해방과 함께 다양한 이념을 내세우는 수십개의 정다잉 조직되면서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넷째, 신민적(臣民的) 정치문화는 정부가 수행하는 일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심리적 작용의 결과이기도 했던 것이다.5)

  신익희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되었다. 그의 고향인 경기도 광주에서는 그를 무투표로 당선시키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광주에서는 신익희 만큼 정치적 경력이나 경륜에 대항할만한 인물도 없었다. 지역주민들은 신익희의 무투표 당선으로 그를 한국정치의 거목으로 키울 작정이었다.6) 지역주민 대부분이 이에 동의했다. 신익희는 지역주민의 지지와 성원으로 무투표로 당선되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할 수 있었다. 당선의원의 소속별로는 무소속이 85석으로 가장 많았고, 신익희가 소속된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5석으로 두 번째로 많이 당선되었다. 다음엔 한국민주당이 29석, 대동청년단이 12석, 조선민족청년단 6석 그리고 대한독립촉성농촌연맹 이 2석 등이고 기타 정당 및 사회단체에서 약간씩 선출되어 모두 198명이 당선되었다.


2.. 제헌국회와 국회의장 당선

  드디어 그렇게 갈망하던 제헌국회가 개최되었다. 온 국민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당선된 198명의 선량들이 5월 31일 오전 10시에 제각기 감격 어린 표정으로 군정청 내에 마련된 임시의사당에 모였다. 임시의회의 제1차 회의는 국회의장과 부의장을 선출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다. 우선 임시의장으로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국회 임시준칙에 의하여 의장과 부의장이 각각 1명씩으로 되어 있는 것을 이정래 의원의 동의로 부의장은 두 명을 뽑기로 했다. 이승만 임시의장이 의장선거를 선언하고, 의장과 부의장 선거를 단기 무기명 투표로 실시하였다. 감표위원에는 장면과 이영준 의원이 지명되었다.

  개표 결과 이승만이 198표 중 188표를 얻어 의장에 당선되었다. 다음은 부의장 선거에 들어갔다. 투표에 임하는 신익희는 전에 없이 흥분했지만 우선 이승만이 의장에 당선된 데 대해서는 만족했다. 개표결과는 신익희가 가장 많은 76표였으나, 김동원 69표, 이청천 33표, 이윤영 11표, 김약수 5표, 장면 2표, 이훈구 1표, 그리고 무효표가 1표씩 각각 나왔다.

  그러나 과반수 미달로 재투표가 실시되었고, 재투표는 1차 투표에서 최고 득점한 신익희와 김동원 두 사람에 대한 결선투표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결국 신익희가 116표를 얻어 80표를 얻는데 그친 김동원을 36표자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승만의 주장으로 다시 투표가 시작되었다. 투표결과 김동원이 100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승만은 부의장에 당선된 신익희와 김동원을 나란히 세우고 의원들에게 취임사를 시켰다. 이 날 오후 2시, 역사적인 국회 개원식과 함께 국회의원으로서 국회부의장으로서 신익희의 본격적인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그 동안 의회의 기능을 잠정적으로 행사해 오던 대한 국민대표 민주의원은 자동적으로 해산되었다. 그동안 임시의장을 맡았던 이승만은 국회의장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민주의원과 함께 과도정부 입법의원도 해체명령이 내려졌고 6월 1일 군정재판도 폐지되었다. 이렇게 한국의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이렇게 건국의 기초작업이 하나하나 진행되는 동안 국회는 6월 2일 제3차 본회의를 열었다. 거기서 신생국가의 초석이 될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기초작업이 착수되었다. 제헌국회는 6월 3일 헌법과 정부조직법 등의 기초위원을 선정하였다. 이때 전형위원들이 뽑은 헌법제정에 들어갔다. 헌법기초위원장에는 한민당의 서상일 의원을 선출하였고, 정치인 즉, 국회의원이 아닌 법률 전문가들 가운데 당시 해박한 법률지식을 소유하고 있던 유진오 등 10명이 전문위원으로 뽑혔다.

  신익희는 헌법기초작업을 위하여 진작에 정경연구회를 구성하여 작업을 진행 시켰다. 신익희가 내밀하게 이끌어 오던 정경연구회는 유진오가 국회의원들에게 정식으로 소개하면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유진오는 행정연구반원들과 함께 헌법안 작업을 진행하였다. 오래 전부터 행정연구반 특별위원에서 작업을 진행 온 것을 유진오가 합세함으로써 헌법안 작업을 순타하게 작업이 진행되었다.  당시 의원들은 행정연구반이라는 말을 듣자 위원들은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의아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 전부터 행정연구반은 신익희의 단독적인 창안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1946년 1월부터 시작되었으나 그 때까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이것은 신익희의 존재가 위원들 사이에 새삼스럽게 부각되는 동기가 되었다.

  여기에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권력구조문제이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기초적으로 국가운영을 대통령중심제로 할 것인가 아니면 내각책임제로 할 것인가가 중심사였다.  헌법 기초안은 행정연구반에서 작성한 것과 권승렬이 마련해 온 것 등 두 가지였다. 검토결과 위원들은 행정연구반의 안을 원안으로 하고 권승렬 안은 참고 안으로 채택하였다. 내각책임제와 양원제, 대통령중심제에 대한 논란이 벌어진 것은 그 직후의 일이다.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지지하는 세력이 지배적이었고, 허정과 이윤영 의원만이 표면적으로 대통령중심제를 찬성하고 나왔다.

  이승만은 한사코 대통령중심제로 헌법을 만들어야 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이승만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이었다. 그것은 그의 정치적 승리 즉, 대통령 당선이 그의 궁극적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신익희는 끼여들지 않았다. 이승만은 내각책임제가 채택되어 이승만이 실권 없는 상징적 존재로 물러앉을 수는 없었다. 비록 고령의 나이였으나 오랜 해외망명에서 돌아와 건국의 벅찬 꿈에 부풀어 있는 그였다. 젊은이 못지 않은 정열과 패기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미국에서 오랜 기간동안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대통령제에 경도되어 있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그는 국회가 헌법의 골격을 잡아 건국 준비작업이 마무리되면 곧 정부에 들어가 자기의 포부대로 새로운 조국의 대통령으로써 국가를 운영하고 싶었다. 자칫 일이 잘못되어 자신이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초조해진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채택하려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이 같은 지시에도 불구하고 헌법기초위원회는 유진오 위원의 안을 놓고 심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전문위원인 유진오는 연일 국회에 나가 그의 초안에 대한 의원들의 질문에 낱낱이 답변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이승만의 연설은 대통령중심제의 헌법채택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 바람에 위원회는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조봉암이 발언을 통해 이승만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그것은 이승만이 다녀간 후의 기초위원들이 대체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바로 그 즈음 계동에 있는 김성수의 집에서는 서상일과 김성수가 이승만의 대통령중심제 주장을 놓고 열띤 의논을 했다. 신익희가 그들을 찾아갔을 때 이들은 내각책임제에 대한 이승만의 반대 때문에 보다 확실해진 의회의 분위기를 매우 만족해하고 있었다. 신익희는 김성수가 서상일과 함께 있는 것을 보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신익희는 어차피 이승만이 대통령 자리에 앉을 것이고 보면, 나중에 그가 헌법을 임의로 고칠 수도 있는 인물임을 간파하고, 헌법기초 위원회가 내각제가 아닌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해 줄 것을 건의했다.

  신익희는 선뜻 김성수의 뜻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결국 제도를 인물에 우선할 것이냐, 인물에 우선할 것이냐, 인물에 맞추어 제도를 만들 것이냐 하는 견해 차이는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신익희와 한민당 수뇌들은 아무런 합의점도 찾지 못하고 서로의 속셈만 타진한 채 헤어지고, 신익희는 곧 바로 헌법기초위원회를 방문했다.

  행정연구반 출신인 유진오, 윤길중 등과 만나 앞으로의 대책을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유진오와 윤길중에 대하여 잠깐 알아보자. 유진오는 제헌헌법을 기초한 인물로 단편소설 『김강사와 T교수』로도 유명한 법학자출신이다. 한 때는 정계에 진출하여 신민당 총재와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 까지 한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의 유택은 경기도 광주군(현,하남시 상산곡동)에 위치하고 있다. 윤길중은 우리나라 사회주의 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정도로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전두환 정권 시절 민정당 대표위원을 맡기도 했다. 신익희의 현실론에 헌법기초를 맡은 젊은 전문위원들은 신익희의 주장에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이 헌법기초 위원회의 전문위원으로 와 있는 것은 결코 몇 푼의 봉급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고 전공한 헌법이론의 이상을 펼쳐 보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신익희의 현실론에 헌법기초를 맡은 젊은 전문위원들은 신익희의 주장에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이 헌법기초 위원회의 전문위원으로 와 있는 것은 결코 몇 푼의 봉급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고 전공한 헌법이론의 이상을 펼쳐 보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신익희의 설득은 결국 그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정치적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오직 헌법기초안이라는 기본적인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헌법기초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다음 재론한다면 모르되, 기초위원들 대부분의 뜻이 내각책임제로 기울고 있는 이상 그들의 손으로 이를 수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신익희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한민당과의 타협에서도 전혀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고, 전문위원들의 의견도 한결같자 장차 일어난 일들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렇다고 돌아가는 대세를 관망할 수는 없었다. 임시정부 시절에 외국인과의 어떤 교섭에서도 지금과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그였다. 그러나, 유진오가 작성한 원안은 제1독회에서 약간 손질한 다음 위원회를 무난히 통과했다. 신익희는 더욱 걱정이 되었고, 이승만의 불쾌한 감정은 극도로 고조되고 말았다.

  6월 21일 열린 제15차 국회 본회의에서는 헌법기초안의 상정을 앞두고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이승만은 비록 한민당이 국회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본회의에서는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회 소속 의원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동원해서 본회의 통과를 저지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국회부의장 신익희는 이승만의 완강한 주장에 눌려 그의 제의를 표결에 부쳤으나 표결 결과는 이승만의 패배였다. 재적의원 175명 가운데 찬성이 겨우 12표에 반대 130, 무효 2표, 기권 31표가 나온 것이다. 참패한 이승만은 헌법이 대통령중심제로 채택되지 않을 경우 자신은 정계에서 완전히 떠나겠다고 선언한 다음 회의장에서 나가 버렸다. 이승만이 퇴장한 후 회의장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신익희는 자신이 나설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발언대에 올랐다.


 “나는 국회의장단의 한 사람으로서 먼저 헌법 제정작업에 전력한 여러분의 노고에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조금 전 이승만 의장의 발언이 여러분에게 더 없는 충격을 주었으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 의장이 왜 그런 과격한 의사표시를 하게 되었는지 다 같이 헤아려 보아야 될 줄 압니다. 좀 주제넘은 말 같습니다만, 지금 나라 안팎의 정세를 살펴볼 때 우리가 비록 유엔의 결의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했다고는 해도 세계 우방의 신임을 얻어 신생국으로서의 첫걸음을 순조롭게 내디딜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여러분의 초안한 내각책임제가 더없이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하지만, 만일 내각책임제를 시행하다가 크게 혼란이 일어난다면 이를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옷도 자기의 몸에 맞지 않으면 헌옷만 못한 법입니다. 헌옷도 환경과 여건에 따라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건에 따라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난국타개라는 중대한 과제를 염두에 두시고 이 의장의 말씀을 좀더 냉철히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익희의 발언으로 회의장의 분위기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으나, 다행스러운 것은 이승만의 발언을 원칙적으로 반대하면서도 어떤 정치적 절충을 꾀하는게 좋겠다는 김준연의 발언이 기초위원들 전원의 찬성을 얻었다는데 있었다. 그러나 내각책임제와 양원제의 관철을 당론으로 하고 있는 한민당의 고충은 대단했다. 이승만의 그와 같은 태도를 간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익희가 회의장을 떠나자 조봉암은 신익희가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대 놓고 말하기도 했다. 그날 한민당은 밤새도록 회의를 열어 김준연의 제안에 따라 헌법기초안을 수정했다. 현재의 원안에서 국무총리의 권한을 대통령 중심제가 아닌 국무총리를 두는 절충식 대통령 중심제가 아닌 국무총리를 두는 절충식 대통령중심제였다. 절충식 대통령중심제 기초안은 조봉암 등 몇몇 무소속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무사히 통과되었다. 그 문제를 놓고 겨우 한숨을 돌리던 신익희에게 또 다른 소식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이승만이 각 부처의 장관과 경찰제도에 관해서까지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었다. 서상일과 함께 국회에 있던 신익희는 이승만의 부름을 받자 어딘가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신익희는 속으로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헌법기초위원들이 언제까지나 이승만의 요구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이승만은 지방출신 의원들이 한마디라도 서로 더하려고 다투는 바람에 정부수립이 늦어진다며 신익희가 무소속 의원들을 잘 타일로 그런 폐단이 없게 하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신익희는 이승만의 말대로 무소속 의원들을 만나 교섭을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소속 의원들은 대개 이승만의 존재를 은근히 두려워하면서도 선뜻 돌아서 주지 않았다. 신익희는 이화장으로 가서 이승만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다음날 6월 29일, 국회는 큰 파란을 겪은 끝에 헌법원안에 대한 대체론에 들어갔다. 7월 4일 제2독회를 거친 헌법 전문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은 7월 12일이었다.������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제1조로 시작한 대한민국 헌법전문 10장 107조가 제헌의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기립 박수로 통과되었다. 또한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접선거를 통해 선출하기로 결정하고 1948년 7월 17일 헌법이 공포되어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한편, 궁지에 몰린 공산당의 끈덕진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건국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어느 날, 신익희는 이승만과 마주앉아 앞으로 세워질 정부조직에 대해 자주 의견을 나누었다. 국회의장과 부의장이라는 직계에 앞서 신익희는 최근 이승만과 뜻을 같이하는 입장이었다. 이화장을 자주 드나들었던 신익희의 머리에는 착잡한 생각이 엇갈리곤 했다. 신익희는 이미 이승만의 계획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정파를 초월한 또 하나의 기구를 만들어 그것까지 손아귀에 쥐고 자신의 권력기반을 견고하게 다질 속셈이 있었다. 신익희는 그 후에 계속 이승만의 후미에서 복잡한 사건들을 원만하게 처리해 나갔다. 사실 신익희와 이승만의 이러한 관계는 나중에 다시 서술하겠지만 그들의 개인적 퍼스낼리티(personality), 리더십의 차별성, 성장배경, 가계의 차별성 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미군기의 독도 폭격사건이 있을 때도, 신익희의 의견은 이승만에게 그대로 채택되었다. 가뜩이나 감정이 좋지 않던 미군정 사령관 하지와 이승만은 그 문제로 크게 대립했다. 결국 하지가 양보해서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다른 곳에서 더 큰 말썽이 일어났다. 전국민이 술렁거리는 판에 김구가 주동이 되어 그의 측근들이 전국민 성토대회를 열고 군정 당국과 정면충돌을 불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 때 이승만 곁에서 김구측에 사람을 보내 사전에 무미해야된다고 주장한 게 신익희였다. 신익희는 어느 쪽에도 반감을 사지 않고 무난히 문제를 해결하였다.


3. 건국과 정치인들

  해방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때로는 갈등과 반목을 보이기도 했다. 그들의 정치적 행적을 좇아가다 보면 해방공간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신익희, 이승만, 김구, 조소앙 등 한국 현대정치사의 초석이 대거 등장하는 이 광경을 밀도 있게 살펴 보자.

   이승만과 김구는 해방정국에서 최대의  정치적 갈등을 겪은 당사자들이다. 그들은 정치적 배경, 성장배경 등이 전혀 다른 정치거목들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정치 행태와 이들 사이에서 협력관계를 모색하려 노력했던 신익희의 모습을 보면 해방공간 요약을 보는 듯하기도 하다.

   신익희는 정부수립을 눈앞에 두고 정국이 원할하게 진행되기를 바랬다. 미군정과의 갈등도 우너하지 않았다. 어차피 미군정이 한국의 행정권 등 모든 권한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이 미군을 성토해서 말썽이 생기면 당연히 손해가 오는 것은 우리에게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군은 점령군으로 와 있으면서 한국의 정치, 경제, 군사 등 거의 모든 권한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이와 때를 같이하여 힘의 공백상태에서 정당, 사회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우국청년단이라는 단체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로 38선 이북을 떠들썩하게 만들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들은 이름에서 보여주듯이 우익들에 의해 행해지는 이른바 ‘백색테러’를 강행하는 집단이었다. 뚜렷한 지도자도 없이 다만 공산당이나 중간파들에 대한 비밀투쟁을 벌이던 그들의 목표는 김규식이었고 다음은 김구였다. 김규식은 다행히 화를 면했고 김구를 습격하려다 그들은 체포되었다. 그 문제로 정부수립을 목전에 두고 세상은 또 한번 시끄러웠다.

  그 무렵, 김구의 거처였던 경교장에는 오랜만의 방문객이 있었다. 국회부의장 신익희가 김구를 찾아온 것이다. 신익희는 이승만과 정치적 연을 맺고 있었으나 김구와의 정치적 의리는 저버리지않았다. 그가 김구를 찾아온 것은 자신이 평소 대인관계에서 원칙적으로 가지고 있던 원만함에도 그 이유가 있었지만, 김구에 대한 의리로 그 입장을 지켜주자는 뜻도 있었다. 김구는 신익희를 잘 알면서도 그가 혹시 이승만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에게 어떤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었다. 신익희 역시 그런 김구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임정생활을 통해 신익희는 김구를 누구보다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도 김구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구와 신익희가 대좌하는 순간 조완구가 들어왔다. 조완구는 김규식 테러사건에 대해 김구가 발표한 성명을 놓고 다시 한민당이 낸 반박성명의 소식을 가지고 김구를 찾아온 것이다. 조완구는 한민당의 성명 때문에 몹시 흥분되어 있었다. 김구는 조완구에게 진정하도록 타일렀다. 신익희도 곁에서 조완구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자, 한독당을 이탈하고 이승만과 손을 잡은 신익희에 대해 평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조완구는 신익희에게 감정을 폭발시켰다. 그러나 그때 김구의 몸에 이상이 왔다. 다리가 마비된 것이었다. 잠시 상대를 겨누었던 그들의 눈은 김구에게 돌려졌다. 가슴에 박힌 총알이 오른편 허리로 돌면서 대혈관을 압박했기 때문에 오른편 다리가 잠시 마비된 것이었다. 김구의 가슴에 박힌 총알은 상해 임시정부 때 공산당원인 이운한이라는 자가 저격한 것인데 기적적으로 죽지 않았던 것이다.

  김구의 갑작스러운 발병은 분위기를 바꾸어 주었다. 어색했던 신익희와 조완구를 화해하도록 만들었다. 경교장을 나오면서 신익희는 몹시 답답함을 느꼈다. 조완구와의 언쟁 때문만이 아니다. 고독해 하기만 하는 김구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남북협상이 어떻든, 김구의 정치적 위 위치가 어떻든 김구는 일평생을 민족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그에게 민족은 하늘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 김구를 심익희는 마음 속에서 늘 잊지 않고 있었다. 비록 정치적 견해와 입장은 달라도 김구에게서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익희는 이승만을 종종 찾았다. 신익희는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던 이승만과 김구가 화해하기를 바랐다. 심익희는 이승만을 만난 자리에서 구국결사 동지회원들이 김구에게 주었다는 호소문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신익희는 김구가 머물던 경교장에서 순간적으로 머리에 떠올랐던 이승만과 김구를 화합시켜 보리라던 생각을 실행하려 했다. 김구가 신익희에게 보여 준 호소문을 통해 이승만과 김구가 화해 할 수 있도록 신익희와 조소앙이 노력했으나 그런 움직임에 대해 한독당이 냉담했고, 이승만 역시 귓전으로 흘려 버릴 뿐이었다. 이시영까지 나서서 애써 보았으나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다. 해방정국에서 정계의 두 거목 이승만과 김구의 화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익희는 그 문제로 이승만을 자주 찾아갔다. 이승만은 신익희가 자주 찾아오는 이유를 너무나 잘 알았다.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는 인간적으로는 화해할 수 있으나 정치적으로는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승만은 신익희에게 김구의 말을 먼저 꺼내 신익희가 의도하는 바를 미리 봉쇄하곤 했다. 이승만은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신익희 앞에서 이승만은 김구를 칭송을 하고 나서는 다시 김구에 대한 비난을 퍼붓는 식으로 김구와의 경원된 사이를 드러냈다. 신익희는 이러한 이승만의 태도에 실망을 했다. 대의를 거스르는 이승만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신익희는 자신의 뜻이 실현될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마음속으로 크게 실망했다. 그는 이 기회에 두 사람을 화해시켜 국가의 앞날에 큰 발전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김구는 복잡 미묘하게 돌아가고 있는 서울을 잠시 피하고자 지방순회 강연을 서둘렀다. 때를 같이하여 김구의 한독당 재정을 전담하던 신창균의 인천소재 조선성냥 공장이 경무부에 의해 군정에 접수되고 말았다. 신익희나 이승만조차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신익희는 그 길로 경교장의 김구를 찾아갔다. 김준연의 부탁으로 간 것이지만 오직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고 현실정세에 대한 견해를 듣고 문안을 겸해서 찾아간 것이다. 경교장에 도착하고 나자 엄항섭으로부터 신창균의 조선성냥 공장에 대한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제는 가뜩이나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이승만과 김구의 사이를 더 벌려 놓으리라고 생각했다. 신익희는 곧장 이승만에게 발길을 돌렸다. 그는 김구의 지방순회 강연에 대해 먼저 말한 다음, 한독당의 재정부장이 경영하던 성냥공장이 돌연 경기도 상무국에 접수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한독당이 그 회사에 나오는 재정으로 겨우겨우 버티어 나가던 일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이승만도 그 소식에 놀라 수밖에 없었다. 신익희는 그 문제로 한독당에서는 한민당이 군정을 업고 정적인 한독정당을 탄압한다고 비난하는 것과 한독당의 재정이 매우 곤란한 모양이라는 것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신익희의 설명을 들은 이승만은 몹시 불쾌했다. 탄압을 받는 한독당을 동정해서가 아니라, 걸핏하면 군정의 권력을 이용하려는 한민당의 태도가 못마땅하기 때문이었다. 신익희는 이승만이 이미 한민당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졌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한민당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는 했지만 그를 상징적인 존재로 앉혀 놓고 당이 실권을 쥐려고 처음부터 계획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경무부장 조병옥을 불러 놓고 추궁했다. 그러나 조병옥은 변명만을 늘어 놓았다. 김구에게는 이 때처럼 우울한 날이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김구는 효창공원 산책 중 한 청년으로부터 남북협상을 계속 주장하면 저격될 것이라는 협박을 받은 경험도 있는 온갖 협박과 테러의 대상이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신익희가 찾아갔을 때에도 김구는 울적한 심사에서 아직 채 풀리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신익희는 조선성냥 공장 사건을 이승만에게 보고한 내용, 이승만이 조병옥을 불러 진상조사를 지시한 일에 대해서 김구에게 말했다. 그러나 신익희의 그 소식은 경무부가 극히 합법적으로 손을 댔다는 조병옥의 답변을 전했으므로 김구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 때 엄항섭으로부터 간밤 효창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다. 때마침 효창공원에서의 그 청년이 경교장으로 김구를 찾아왔다. 그는 얼굴에 온통 붕대를 감고 있었다. 김구를 살해하지 않은 데 대한 보복을 당한 것이었다. 청년은 방으로 들어오더니 김구와 신익희에게 공손히 큰절을 했다. 자기는 간밤의 일로 배신자의 낙인이 찍혀 오늘부터 애국단과 손을 끊었으며 33일 안에 그들이 김구를 제거할 계획이니 몸조심하도록 알리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예사롭게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신익희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느꼈다. 경교장을 나와 이승만을 방문한 신익희는 소위 조선애국단이란 불순분자들에 대해 이승만과 의논을 했다. 신익희는 우익테러를 경계해햐 한다고 이승만에게 제안했다. 신익희의 제안에 대해 이승만도 찬성이었다. 이승만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신익희의 주장대로 그 문제에 대해 재발이 없도록 당부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 결과 몇 개의 행동대를 편성하고 있던 조선애국단에 소속된 사람들은 수도청 형사대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런 가운데 국회는 나라의 초석이 될 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정부조직법도 수정, 통과시켰다. 앞으로 행정부와 사법부만 구성되면 명실공히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수립 전야는 너무나 혼란했다. 과거 1년 동안 군정 하에서 민정을 담당해 온 과도정부는 점차 그 기능이 위축되어, 과도정부 최고 정무관 서재필이 7월 10일 사의를 표명했다. 민정장관 안재홍은 이미 사임을 한 다음이었다. 미국으로 돌아가려던 서재필은 이구수 등 몇몇 국회의원들의 만류로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만 한국에 머물러 있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김구나 김규식은 그 일을 크게 환영하는 반면, 한민당이나 이승만에게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철수 문제는 워싱턴 당국이 결정할 문제라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정계의 관심은 국무총리에 쏠렸다. 특히 조소앙이 내정되었다는 설에 즉각 반기를 든 단체는 국민회와 한국민주당이었다. 국민회 소속 배은희는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이화장으로 달려가겠다는 청년 당원들을 만류하느라 갖은 애를 썼다. 신익희는 반발하는 국민회 청년들을 그런 식으로 잘 무마했다. 그러나 그 자신도 의심스러운 바가 없지 않았다. 며칠 전에 자신이 조소앙을 이화장으로 안내했을 때, 이승만은 조소앙과 별실에서 얘기를 주고받았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전혀 몰랐었다. 비록 정당은 달라도 그는 조소앙과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다. 둘 사이에 거리감을 느낀 것은 조소앙이 남북협상에 다녀온 다음부터였다.

  사회당 성명을 발표한 조소앙의 배후를 세부적으로 알 길이 없었다. 더구나 겉으로만 의논을 해 온 듯한 조소앙의 태도도 몹시 불쾌했다. 조소앙이 그 문제에 대하여 의논해 왔을 때 신익희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대해 주지 않았던가. 신익희로서는 조소앙의 국무총리설을 믿을 수 없었다. 신익희는 두 사람의 사이가 도무지 석연치 않게 느껴졌다. 신익희는 그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조소앙의 집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낙원동 이시영의 집으로 가 보았으나 조소앙은 거기에도 없었다. 그 때 조소앙은 김규식의 초청으로 삼청장에 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는 신익희는 다시 발길을 돌려 경교장으로 향했다. 혹시 조소앙을 만날까 해서였다. 자기들이 수립토록 한 정부를 자기들이 승인하지 않는 데서야 순리가 아니지 않겠느냐는 신익희의 말에 김구는 다른 뜻을 비쳤다. 38선 이북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해도 승인해 주겠냐는 것이었다. 신익희는 즉시 부정했다. 신익희는 만일 이북에서 정부를 수립한다면 저희들끼리 만든 괴뢰 정부에 불과하다고 강력히 말했다.

  신익희와 김구의 정담이 무르익을 때 이시영이 찾아왔다. 오랜만의 경교장 방문이었다. 이시영은 신익희가 찾아왔다가 경교장으로 간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었다. 김구는 친히 계단까지 내려가 이시영을 부축하고 올라왔다. 서로의 인사말이 오고간 다음 이시영이 입을 열었다. 신익희는 선후배 정객 두 사람의 정담에 끼여들려 하지 않았다. 그런 조심성으로 해서 이시영과 김구에게 평소 신뢰를 받았다. 신익희는 그들 두 사람이 화제를 정치문제로 몰리자 자세히 들었다. 이시영은 김구가 이승만과 손을 잡도록 권했다. 신익희까지 있는 자리에서 결정을 볼 셈이었다.

  신익희는 화를 내거나 별로 반대하는 기색도 아닌 김구의 기분을 관찰해 보았다. 그 결과 김구가 오랜만에 다시 만난 선배와 정치문제로 다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구는 전날처럼 다투지 않고 선배인 이시영에게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만 대답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익희 주변에서는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와 친분이 두터운 조소앙과 조병옥이 불화였다. 과거 조소앙은 조병옥을 미군정의 권력을 등에 업고 기고만장해서 군정의 연장을 꾀한다고 판단했고, 조병옥은 남북협상 문제를 놓고 조소앙을 신랄하게 비판했었다.

  그 후로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이 요즘 경찰의 우익단체 수사를 계기로 더욱 악화되었다.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우익 청년들을 스스로 잡아들이는 경찰의 뜻을 모르는 조소앙은 이를 따지기 위해 조병옥을 찾아갔다. 그러나 말도 못 붙이고 경무부를 쫓겨 나온 조소앙은 권력에 의지하기로 결심하고 이승만을 찾아갔다. 정부수립에 협조하겠다고 태도를 바꾼 것이다. 이승만은 무슨 속셈인지 조소앙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조병옥과 가까운 신익희를 보자 비난을 중지했다. 신익희는 국민회에서 조소앙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국민회 지방대의원들을 맞아들이기 위해 그 곳에 가 있었다. 남북협상에 참가한 자는 정부 구성요원이 될 수 없다는 한국민주당의 국회 건의에 대해 격분한 조소앙이 찾아온 것이다.

  조소앙은 한민당에서 정부요인 자격기준을 건의해서, 남북협상에 다녀온 사람은 무조건 정부수립에 참여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말을 했다. 그렇게 해서  신익희는 그들을 돌려보내는데 겨우 성공했다. 하지만 이화장에 잠복하고 있던 형사들이 곧 조병옥은 즉시 이화장으로 달려왔다고, 이승만의 무마작전으로 조병옥은 국민회의 건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승만이 자신의 공로를 극구 찬양해 준 다음 정부수립에 중책을 주겠다고 했으나 조병옥은 국민회의 건의가 마음에 걸린 것이다. 그런 내용을 전혀 모르는 신익희에게 조병옥으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신익희는 즉시 만났다. 전부터 국민회가 한국민주당을 들어 비난했고, 국정에 참여하는 자신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그들이 왜 자신이나 한국민주당을 그토록 싫어하는지 모르겠다는 불평이었다.

  사상적인 문제에 대해 그는 이승만 이상으로 반공정신이 확고했다. 그는 이미 대한반공연맹을 조직하여 반공사상을 고취, 계몽에 노력해 왔다. 멸공에 총궐기, 멸공에 총단결, 멸공에 총집중을 호소하여 붉은 무리의 오열 박멸에 크나큰 역할을 했었다. 또 한가지 그가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국민회 동지들의 강요로 남조선과도 입법의원의 민선 대의원으로 종로구 보궐선거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 해 1월 20일 제12차 본회의에서 그가 행한������신탁통치 반대에 대한 발언������은 국내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당시 의장 김규식이 사임한 이후 그 후임으로 의장에 피선되었었다. 그 후 1948년의 총선거에서 고향의 모든 사람들이 과거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하고 무투표로 당선시켜 준 후 제헌국회에서 부의장에 당선된 것이다. 신익희가 겨우 진정시켜 돌려보낸 조병옥(趙炳玉, 1894-1960)에게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한성일보가������민주분열을 조장하는 무고를 규탄한다!������라는 제목하에 조병옥을 신랄하게 물고 늘어진 것이다. 조병옥은 독립운동가로써 또는 정치가로써 명성을 날린 사람이다. 그는 1925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 해 귀국하여 기독교 천년회 이사와 신간회총무를 지냈다. 1929년에는 광주 학생 등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3년 동안 옥살이한 경험도 있는 사람이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송진우 등과 한국 민주당을 창당하였고, 1948년 정부 수립 뒤 대통령 특사, 유엔 한국대표 등을 지냈으며 6․25 사변 때 내무부 장관으로서 대구 방위 전선에서 진두지휘 하였다.

  그런 조병옥이 분함을 참지 못해 씩씩거릴 때, 신익희는 이승만의 부름으로 이화장에 갔다. 그에게 한성일보에 대한 국민의 여론을 묻기 위해서였다. 신익희는 이승만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원래 다변한 인물인 이승만이다. 거기에 비해 신익희는 술수 같은 것은 좀처럼 부릴 줄 모르는 직선적인 성격이었다. 신익희는 비로소 이승만이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신익희는 그 일로 이번에도 이승만의 정치개척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한편, 조병옥은 그 나름대로 자기 방어에 여념이 없었다. 그 때 다른 곳에서 엉뚱한 문제가 터졌다. 김지웅이란 자가 나서서 김준연과 결탁하여 되어 김구와 김규식 등 소위 남북협상파들이 공산당과 내통한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경교장에서 그 문제로 풍랑이 일어나고 있을 때, 김준연은 이화장에서 이승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심 김구가 공산당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서도 이승만은 김준열을 극구 칭찬해 주었다. 그러는 한편, 김준연 역시 공산당이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주는 이승만의 속셈은 누구도 알 길이 없었다. 신익희가 이화장에 갔을 때 김준연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변명으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신익희는 눈을 크게 떴다. 이승만은 분명히 김준연의 성명을 극구 찬성하는 듯했다. 이승만이 왜 그런 태도를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김구나 김규식은 이미 방패를 잃은 무력자라는 게 신익희의 견해였다. 그런 견해는 한국독립당 당무회의에서의 격론이 입증하였다. 당무회의에서는 김준연의 성명에 대해 신랄한 반박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김구의 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닐뿐더러, 국민은 그 사실을 인정해 주리라는 것이다. 그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방침을 밀고 나갔다. 김구가 남북협상에 관한 제의를 해서 유엔 한국위원단의 초청을 받았다는 소식에 이승만은 불쾌하다 못해 노기까지 띠었다.

  부름을 받고 신익희가 갔을 때 이승만은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해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신익희는 이승만에게서 김구와 유엔 한국위원단과의 화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은밀히 알아보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이승만은 김구의 주장이 유엔에 전달되면 우선 남한의 우익정당이 단결을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터이므로 적절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신익희도 내심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 문제로 세상이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국회에서 다루어 소란을 막자는게 그의 의견이었다. 이승만이 비록 김구를 미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익희로서는 그들 사이가 최소한 더 멀어지지 않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들 두 사람의 격심한 불화는 나라의 정부수립에 그만큼 악영향을 준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국회에서 그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고 있을 때 김지웅이라는 사람이 경교장으로 김구를 찾아왔다. 한국인으로 중국군에서 육군 소장을 했다는 김지웅은 정국이 혼란한 시기를 틈타, 어느 쪽이든 붙어서 권세를 잡아 보려는 속셈을 지닌 자였다.

  김구를 속이려다 불호령을 맞은 김지웅은 도망치듯 경교장을 나왔으나 단념하지 않았다. 다음엔 이화장으로 찾아갔다. 기회만 있으면 수중의 사람을 확보하려는 이승만은 김지웅의 모든 말을 그대로 믿는 듯했다. 신익희가 갔을 때 이승만으로부터 자신을 도와 달라는 언질을 받은 김지웅은 자못 감격해하고 있었다. 신익희는 뜻밖의 손님을 보고 약간 주춤했으나 정작 놀라고 당황하는 것은 김지웅이었다. 김지웅은 신익희를 보는 순간 조금 전까지의 큰 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안색이 변했다.

  신익희는 놀랐다. 이승만이 만일 김구나 신익희처럼 중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신익희는 어쩔 줄 모르는 김지웅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중국군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아는 신익희였다. 도망치다시피 허리를 굽실거리면 나가는 김지웅에게 자주 찾아오라는 말까지 하는 이승만을 보고 신익희의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

  신익희의 설명에 의해 김지웅은 그 후 이화장과 경교장의 출입을 거부당했다. 그러나 그 일이 불씨가 되어 뒷날 큰 위험을 겪게 될 줄은 신익희도 전혀 몰랐다. 김지웅은 신익희에 대해 이 때 악감정을 품었던 것이다. 어쨌든 김지웅은 화살을 김구에게 겨누고 조병옥 등을 찾아다니며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김지웅과 같이 교활한 인물에 대해서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던 신익희였지만 그는 어느 정파간에서도 비판을 받지 않았다.

  특히 그는 포섭력이 강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신익희 자신이 한독당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그에게 국회 안에서 김구를 따르는 소장파 의원들이 설득을 맡겼다. 조병옥의 권고에 따라 이승만이 내린 결정이었다. 조병옥이 신익희에게 그토록 무거운 짐을 떠맡기도록 한 것은 자기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이른바 소장파들을 견제하려면 한민당이 정면에서 나서는 것보다, 신익희를 앞세우는 편이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평소의 성격 그대로 이승만의 종용을 받은 신익희는 곧 소장파의 핵심 멤버를 초빙해서 간담회를 열었다. 의외로 소장파 의원들은 강경했다.

 평화적인 수단으로 조국이 통일만 되면, 그 후 이 나라가 공산주의가 되더라도 하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소장파 의원들 가운데는 벌써부터 공산당의 정치자금을 받아 활동하는 남로당원이 있었다. 그들은 사사건건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지시를 받고 있었다.

  신익희는 그들이 주장이 김구의 통일방안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앞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사회의 분노와 김구의 정치노선이 빚을 사태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의 고심은 현실로 나타났다. 원래 한민당 소속이던 김약수 의원이 1947년 5월 30일, 조선공화당을 결성하고 자신이 서기장이 되었다. 그는 좌도 우도 아닌 중간에서 쌍방이 눈치를 살피던 중, 돌연 김구의 통일방안을 지지하고 나섰다. 극단적인 우익세력과 맞서는 원내의 적잖은 소장파를 이 기회에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그는 김약수의 의도가 의외로 확고한데 대해 절로 한숨이 나왔다. 조선공화당이라는 것을 만들어 대중권익 보호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상은 위험한 인물이라고 판단한 신익희는 이승만에게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승만은 결국 김약수를 위시한 소장과 의원들을 국회에서 축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사태는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김약수와 노일환은 곧 국민회와 한민당의 반대세력을 규합해서 신당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적어도 대통령 선출 전에 신당 규합을 이루어 원내 세력을 과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민당의 강력한 조직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국민회의 포진으로 이들의 꿈은 손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익희는 그와 같은 사실을 전해 듣자 원내 동향이 걱정되었다. 그는 곧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한 다음 일련의 협의를  가졌다. 신익희는 국회 내의 동향으로 보아 김약수와 소장의원들이 신당을 조직하여 국회 내에서 그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이승만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빛을 띠었다.

  적어도 이 나라를 영도하는데 있어서 자기 이상의 인물이 없다고 자부하는 이승만이었다. 그런 자신에 대한 소장의원들의 도전적 태도는 하나의 정신 이상적 망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모든 동포가 오직 자기를 따름으로써 조국의 장래도 기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승만인 것이다.

  이화장을 물러 나온 신익희는 곧 발길을 조소앙의 집으로 돌렸다. 비록 남북협상을 다녀온 후 정부수립을 지지하고 있으나, 문제의 소장의원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로 생각하는 인물은 조소앙이었다. 신익희는 소장파 의원들의 배후인물이 조소앙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신익희 자신의 판단이었다.

  김구의 협상 통일론을 지지하고 나선 노일환, 김약수 등은������선 통일 후 정부수립������론에  동조하고, 단정수립을 반대하면서도 남한만의 정부수립을 고집하는 한민당의 움직임에 대해서 신익희로서는 어떤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위기는 매우 미묘하게 진전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신익희는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다.

  조소앙에게 소장 의원들의 무마를 당부한 신익희는 소장 의원들의 동태가 계속 심상치 않다는 소식에 곧 윤석구를 만났다. 신익희와 윤석구는 한때 한독당을 창당한 동지였으며 과거 중국 망명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신익희가 갔을 때 윤석구는 그가 왜 왔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급진파에 휘말려 사리판단을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는 간곡한 당부였다.

  윤석구는 무소속 소장 의원들이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뚜렷한 목적과 이유를 자기 나름대로 주장했다. 그들이 당초 국회에 들어올 때는 이승만을 받들어 나라를 이룩할 뜻에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한민당만이 독주하고 있어 다른 정당은 고개도 못 드는 판국이니, 그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정작 조국의 광복을 위해 해외에서 투쟁한 사람들은 지금 발붙일 곳이 없으며, 무소속 소장 의원들은 바로 그런 점을 두고 한민당과 투쟁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세간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반 이승만 세력의 규합이라지만, 본 목적은 이승만을 반대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윤석구의 그런 열띤 주장은 신익희가 생각하는 급진파들의 주장과는 좀 달랐다. 신익희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것은 한민당에 대한 투쟁에 관해서가 아니라 소장 의원들의 평화통일과 양군철수 주장에 관해서였다.  신익희가 자신의 그런 우려를 말하자 윤석구는 오히려 그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던 것이다. 윤석구는 신익희의 큰코다치는 말을 비로소 이해했다. 그러나, 윤석구는 급진파로서 무소속을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노일환이나 이문원 등과 적극적으로 뜻을 같이 하지는 않았다. 신익희가 그 문제에 대해 사방으로 뛰고 있을 때 다른 곳에서는 전혀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구를 공산당이라고 맨 처음 주장하던 김지웅이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한독당에서 이승만 암살을 모의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조병옥을 찾아가 그런 주장을 했고, 다시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마침 이화장에 있던 장택상이 김지웅을 대신 만났다. 김지웅은 그 자리에서 미군 수사기관에 있으며 조병옥의 자문위원이라는 엉터리 직함까지 내세우다 장택상으로부터 이화장을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김지웅이 던진 이승만 암살 건은 장택상이나 조병옥을 긴장시켰다. 당사자인 이승만도 몹시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1년 전 이화장을 찾아와 중국 육군의 소장이었다고 떠벌리다 신익희 때문에 꽁무니를 뺐던 김지웅이었다. 이승만은 그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관심한 이승만이 갑자기 적극적으로 그 문제를 확대시켰다. 이승만은 윤 비서를 통해 국회로 연락하여 신익희를 부르도록 했다. 김구 일파가 자기를 제거하려 한다는 정보에 의심을 굳히고 신익희와 그 대책을 협의하려는 것이다. 이 무렵, 신익희는 몸이 불편하여 국회에 등원치 않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신익희가 몸이 불편하다는 소식을 들은 김약수가 문병차 왔는데 그는 사실상 매우 중대한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그는 김구 일파의 이승만 살해 음모설이 당치도 않은 모략이라고 말했다. 신익희는 그 엄청난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한민당이 아무리 김구를 미워해도 그런 근거 없는 말을 함부로 한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신익희는 김구의 결백을 믿었다. 김약수는 더욱 열을 올려 자기의 주장을 역설했다.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익진영에서는 그런 모략과 함께 송진우 사건이나 장덕수 사건까지 그 배후가 김구하고 몰아 세웠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나올수록 소장파에서는 더욱 그들에 대한 투쟁을 강화하겠다는 주장이었다.

  신익희는 김약수가 돌아가자 불편한 몸을 이끌고 즉시 이화장으로 갔다. 이승만은 그가 자기의 부름을 받고 온 것을 생각했다. 신익희는 이승만의 설명부터 들었다. 자기를 해치려는 자들이 있다기에 처음에는 믿지 않았는데 차츰 그 동태를 살펴보니 전혀 낭설이 아닌 것 같고, 그 무리가 바로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신익희는 김구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자신이 백범을 얼마나 잘 알고 있으며 그는 절대로 이승만을 해칠 사람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런 모함을 믿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신익희가 아무리 주장해도 이승만은 냉담할 뿐이었다. 신익희는 하는 수 없이 그냥 이화장을 물러 나왔으나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 앞으로 자기의 말을 믿는다는 것은 곧 김구의 말을 믿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승만의 말이 그를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는 집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한민당을 찾아갔다. 마침 김준연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신익희는 이화장에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김준연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이제야 알았느냐는 투였다. 김준연으로부터 경찰이 이미 수사에 착수했다는 말을 들은 신익희는 깜짝 놀랐다. 한편, 문제의 발설자 김지웅은 조병옥에게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확증은 고사하고 정보수집까지 어렵게 되자 몹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전부터 안면이 있는 미군 CIC의 텐스 소령을 찾아갔다. 다른 각도에서 미군 세력을 움직여 목적을 달성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김지웅의 그와 같은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혼자서 공을 세우려고 날뛰던 텐스 소령은 우선 경무부장 조병옥으로부터 다음은 수도청장 장택상에게서까지 협조를 거절당했다. 다음으로는 사령관 하지를 찾아갔으나 거기서도 결국 거절당했다. 한국인에 관한 일은 한국인이 해결하도록 놓아두라는 하지의 말이었다. 다만 한가지, 사령관 하지는 김지웅이 주장한 경교장 수색을 조병옥에게 명령했다. 조병옥은 장택상과 그 문제를 의논했으나 장택상은 반대의견을 고집했다. 김구가 있는 경교장을 수색한다는 자체를 피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발설자인 김지웅을 의심하고 그를 추궁해서 사실 여부를 밝히기로 하였다.

  조병옥이 수도청에서 그 문제를 합의하고 있을 때, 신익희는 경찰정보의 출처를 알아보기 위해 경무부를 방문하고 있었다. 신익희는 조병옥이 올 때를 기다리는 동안 그 곳에 있는 동앙일보를 흩어 내려갔다. 2면을 들치자 김준연이 쓴 고하 송진우 추모기가 눈에 들어왔다. 기사를 찬찬히 읽어 내려놓았다. 거기에는 송진우를 죽인게 좌익이 아니고 우익이며 그들은 이번에 또 이승만을 해치려 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신익희는 기가 막히고 탄식이 절로 나와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조병옥이 들어왔다.

  신익희나 조병옥으로 하여금 정보의 진위를 문제삼지 말고, 김구가 언제 어느 때 그런 행동을 하는가 주시해야 된다는 말이었다. 이승만은 두 사람의 설명에는 전혀 아랑곳 않고 김구가 자신을 해칠 것이라고만 주장했다.

  신익희는 그런 이승만의 고집을 놓고 생각해 보았다. 이승만은 김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또 믿었다. 김구가 자기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것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엉뚱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일까? 마음과 다른 주장을 고집하는 이승만에 대해 신익희는 나름대로 분석을 했다. 즉, 이승만은 김구가 단순히 독립운동가일 뿐이지 정치인으로서는 자질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김구라는 존재는 나라와 동포의 장래를 위해 매장되어 주어야만 했다. 정치인은 될 수 없는 혁명가로서 그것도 과격한 방법이나 쓸 줄 아는 김구가 엉뚱한 주장이나 하도록 더 두고 볼 수가 없는 것이 이승만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신익희는 이승만의 굳은 얼굴에서 이번 기회에 김구를 매장시키려는 결의 같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놓고 신중히 생각했지만, 그로서는 달리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었다. 이승만이 그런 결심을 하고 있는 이상 신익희는 물론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것이다. 신익희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도 없어서 곰곰이 궁리한 끝에 영등포에 있는 기독교 장로 이종수를 찾아갔다. 이종수는 김구와 동향일 뿐 아니라 과거 망명시절부터 김구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이승만을 직접 상대해서 김구의 무고함을 증명하려다 실패한 신익희는 김구를 설득하기엔 이종수가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신익희는 지금 김구가 난처한 입장에서 벗어나려면 남북협상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해야 된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김구의 정치적인 생명이 끝날 것은 물론,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고 말했다. 신익희는 그런 사실을 누누이 이종수에게 강조한 다음, 김구의 구제가 시급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는 어떤 경우에라도 이승만이 김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원치 않았던 것이다.

  신익희와 약속을 한 이종수는 실제로는 전혀 자신이 없었다. 김구가 남북협상을 포기하도록 만들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김구의 정치생명을 건지기 위해서라도 나서야 했다. 그는 결국 김구를 붙들고 눈물로 호소 할 결심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김구를 만난 이종수는 눈물로 하소연했으나 김구는 듣지 않았다. 결국 신익희와 상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이종수의 고백을 들은 김구는 한 마디로 일념통일과 응접불가(應接不可)라는 단호한 말로 거절했다.

  신익희는 이종수를 경교장으로 보낸 다음 날 경무부로 조병옥을 방문했다. 그는 이번 사건 의 발설지를 처벌하고 김구에 대한 모략을 국민 앞에서 드러내어 이승만과 국민의 오해를 풀어 볼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에 김구를 이승만이 지나치게 의심하기 때문에 판단을 그르칠 염려가 있으며 그것은 바로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큰 불행이었다.

  신익희는 조병옥을 만나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조병옥은 난색을 표했다. 발설자를 처벌할 수는 있지만, 아직 모르는 국민들에게 공개하여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 조병옥의 뜻이었다. 조병옥은 또한 신익희의 우려가 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신익희가 김구나 한독당을 옹호해야 될 입장이라고 해도 조병옥은 한민당 편에 서 있는 경무부장이다. 그는 솔직히 김구가 어떻게 되는, 한독당이 어떻게 되든 신경을 쓰고 싶지 않은 입장이었다. 조병옥은 신익희의 말대로 김지웅에 대한 엄한 처벌을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조병옥은 김지웅이 또 다른 계략을 이미 세워놓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텐스 소령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가 신익희에게 알린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원래 그 사건을 발설한 것은 최기남으로서 그는 한독당 평당원으로 있다가 탈당하여 김지웅의 심복으로 있는 자였다. 최기남은 김구의 이승만 암살설 외에도 또 다른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미군 CIC가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히 조병옥으로서는 발설자가 따로 있으므로 김지웅을 허위 발설자로 처벌할 수 가 없게 되었다. 조병옥으로부터 그런 보고를 받은 신익희는 여전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배후를 캐내어 어떤 자가 그런 모략을 했는지 조속한 시일 내에 단락을 짓는 게 난국을  수습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는 조병옥이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다. 신익희가 아무리 강경하게 주장해도 그는 이번일을 그냥 덮어 둘 심산이었던 것이다. 신익희는 조병옥의 그런 속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나름대로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급한 것이 김구의 설득이었으나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자 그만 낙담하고 말았다.

  김구에 대해 어떤 노력도 더 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그는 괴로웠다. 그것은 김구와 앞으로는 뜻을 달리해야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앞에서 계속 김구나 한독당을 옹호하는 것이 자신의 입장까지 궁지로 몰아 넣을 것을 그는 잘 알았다. 이승만으로부터 더 이상 오해를 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김구나 한독당에 대한 애착을 단념키로 하고 이승만을 찾아갔다.

   김구라는 사람에 대한 과거가 어떻든 지금은 모든 동포들이 필요로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 이승만은 신익희가 자신을 도와 이 나라의 정치인이 될 생각이라면 김구와의 인연을 끊으라고 강조했다. 그 때 뜻밖에도 조봉암이 찾아와 이승만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조봉암은 이승만이 불렀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이승만이 조봉암의 의사를 새삼스럽게 타진했다. 조봉암은 자신이 한국민주당이나 국민회의 주장에 반대한 이유를 밝혔고, 이승만은 그의 말을 이해했다. 원내에서 분과위원장을 선출할 때 한민당이나 국민회 의원들이 다른 의원들의 발언조차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선출한 이야기를 이승만이 이해하게 된 것이다.

  조봉암이 이승만과 굳은 악수를 교환하며 협력할 것을 다짐했다. 김구와 한독당에 대한 애착심을 끊기로 결시한 신익희는 이승만에게 있어서 전보다 더 필요한 존재였다. 조봉암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앞으로 국회는 별 말썽이 없이 소신대로 운영할 수 있다고 믿은 이승만은 소장파 의원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놓고 신익희와 상의했다.

   경무부의 조병옥과 수도청의 장택상은 사령관 하지의 강력한 추궁으로 경교장으로 수색하게 되었다. 물론 형식적인 수색이었다. 사복차림의 형사 몇 사람을 보내 김구의 양해를 얻은 다음 그 곳에 무기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여 미군 CIC가 입수한 정보는 허위임을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정보가 미군 정보기관에 입수되었으며 적어도 군정이 폐지되기 전에 한독당에 대한 결정적 탄압을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미군 수사기관의 그런 복안을 뒤늦게 눈치챈 조병옥은 서둘러 신익희를 찾아왔다. 그렇게 하고 헤어지 신익희는 얼마 후에 다시 조병옥의 방문을 받았다. 조병옥은 이승만으로부터 한민당을 반대하는 무리들이 대통령 선출을 앞두고 신당운동을 벌인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신익희의 말에도 불구하고 조병옥은 자신의 견해를 주장했다. 그러나 신익희가 염려하는 것은 신당운동이 대통령 선출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조병옥의 그런 주장에 대해 그가 신당운동을 와해되기를 바라는 것은 이승만이었다. 신익희는 신당운동의 주동인물로 알려진 김약수를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를 국회 부의장실에서 만났을 때 김약수가 먼저 앞질러 말했다.

  김약수 역시 신익희의 동조에 기분이 좋아져서 물러갔다. 모처럼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는가 싶었던 신익희의 기대는 이승만과 그를 따르는 배은희 등 국민회 간부들에 의해 완강한 반대의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신익희로부터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진 이시영이 이승만에게 그 소식을 전했고, 이승만이 강경책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다음 날, 이승만이 신익희와 배은희 등 국민회 간부들을 이화장으로 불러들여 문제의 발언을 했다. 그의 말은 어떤 경우가 있어도 김구를 정부수립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결의를 노골적으로 암시했다. 이승만의 말에 선뜻 배은희가 나서서 잘라 말했다. 국민회 소속 의원 가운데 그런 주장을 하는 자가 있다면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로써 신익희는 자신의 계획이 벽두부터 난관에 부딪친 것을 알았다.

 신익희는 김약수와 나눈 대화에 도저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는 먼저 국민회의 공식결정을 내리자고 주장했다. 그가 알기에 국민회 안에서도 아직 김구를 지지하는 의원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배은희의 태도는 김구 부통령설을 주장하는 자들과는 이 시간부터 국민회에 같이 일할 수 없다는 몹시 강경한 태도였다. 신익희는 자신의 생각이 어느 틈에 무너져 나가고 있는 소리를 귀로 듣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아직 그 뜻을 완전히 단념할 생각은 없는 신익희였다.

 한편, 김약수는 자신의 뜻을 피력하기 위해 김구를 찾아갔으나 김구의 주장은 오직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에 즉석에서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승만은 그 나름대로 몹시 불쾌했다. 김구가 부통령이 되든 안되는, 국민회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자체가 몹시 불쾌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까지 생각하는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이 문제를 결혼 풍습에 비유하며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좋든 나쁘든 강제결혼이 가능하지만, 철이 든 다음에는 강제결혼이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김구가 이승만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아닐뿐더러, 그가 자신을 몹시 싫어하는데, 만일 어울린다면 정국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이었다. 이승만은 그 경우를 가정의 파탄과 비유해서 신익희에게 설명했다. 신익희는 이승만의 이야기에 대해 귀를 기울였다.

 지금껏 누구보다도 김구의 부통령 추대에 미련을 가졌던 신익희로서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누구한테도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김구에 대해 또 다른 문제가 터졌다. 조병옥이 김준연으로부터 김구가 공산당과 내통한다는 정보를 들은 것이다. 조병옥은 즉시 그 사실을 신익희에게 알렸다. 소식을 들은 신익희는 너무 놀라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 정보가 김지웅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조병옥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김지웅이란 인물이 무엇 때문에 끝까지 김구를 물고 늘어지려는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신익희는 국회에 등원하는 즉시 김준연을 만나 김구의 공산당 내통설을 은밀히 물었다.

 김구가 또 다시 당할 시련은 자명한 일이지만, 지금의 신익희로서는 그 문제에 대해 어떤 대책도 강구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우선 이승만이 그 사실을 알면 이번에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승만의 그런 오해가 두렵고, 자신의 정치생명에 영향이 미칠 것을 염려해서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드러내지 않고 누구와도 등을 돌리지 않은 상태로 일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신익희는 이승만으로부터 이시영을 만나라는 새로운 지시를 받고 그를 찾아갔으나 이시영은 집에 없었다. 이시영이 의정부근처의 다락원에 있다는 가정부의 말을 듣고 신익희는 그 길로 다락원으로 갔다.

 신익희는 이승만의 표정을 살폈다. 이승만이 자신 앞에서 몹시 착잡해지는 마음을 애써 숨기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익희도 이승만의 다른 속셈은 전해 짐작하지 못했다. 이승만은 신익희에게 알리지 않고 윤 비서에게 이시영을 데려오도록 했던 것이다. 다른 보고차 이화장에 들어갔던 신익희는 때마침 윤 비서와 이시영이 와 있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이승만은 마치 이시영이 제발로 다시 돌아온 것처럼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이시영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신익희로서는 이시영이 분명히 은퇴의 뜻을 밝힌 지금, 다시 이승만을 찾아온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한편 국민회를 정당으로 개편해 보려는 거동이 몇몇 간부들에 의해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어찌된 일인지, 한민당에 의해서 이에 대한 정보가 재빨리 탐지되었으며 이 정보에 접한 한민당 내부는 벌집을 쑤셔 놓은 것같이 소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한민당은 원내 유일의 공당이었으며 오늘날까지 오직 이승만을 업고 정부수립에 박차를 가래 온 정당이었던 것이다. 만일 국민회가 정으로 개편된다면 그것은 이승만이 영도하는 정당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그 정당이 여당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이승만을 업고 정부수립에 매진해 온 한민당은 하루아침에 지붕을 잃고 하늘을 쳐다보는 신세가 될 것이 너무 명백하다. 그 문제를 놓고 한민당 간부들은 장시간 갑론을박하던 끝에 우선 이 정보의 진위 여부를 알아보기로 했다.

 허정, 조현영, 서정희 등 대표들이 신익희를 만나 보기로 한 것이다. 신익희는 그들 한민당 대표들로부터 사실을 전해 듣자 시원히 대답해 줄말이 없었다. 정작 기가 막히고 답답한 것은 신익희였다. 그도 그 이상은 이승만으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듣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이승만이 조병옥과 장택상에게 비서를 보내, 정부통령 적임자와 내각은 어떤 사람들이 적당한가 여론조사를 해서 보고하도록 한 사실도 신익희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가 과거 5백년의 전제정치와 또 36년간을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군국주의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어느 나라보다 민주주의가 생소하다는 것이 이승만의 설명이었다. 지금 우리 나라 국민들은 민주주의 정치가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며, 뿐만 아니라 일부 지도자와 일부 국민들은 장차 이룩하려는 민주주의를 개인의 방종으로만 안다고도 역설했다. 신익희는 이승만의 말에 대해 전적으로 찬동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아주 타당한 말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신익희의 그런 반응을 안중에 두지 않는 듯이 계속해서 또렷또렷 말했다. 국민들의 수준이 정당정치를 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이승만의 주장이었다.

 이승만이 신익희에게 따지려는 핵심은 그러한 상황에서 왜 국민회를 정당으로 개편하려는 것이냐는 설명이었다. 국민회의 정당 개편설이 신익희에 의해 나온 것으로만 알았고, 국민회 안에 파벌을 조성하고 국민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도 바로 신익희라고 의심했던 이승만이다. 그가 배은희의 태도에 대해 몹시 흥분하고 있는 것을 본 신익희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화장을 나온 신익희는 곧 낙원동에 있는 이시영을 찾아갔다. 이승만과 그가 어떤 타협을 보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신익희는 내심 이시영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시영은 앞으로 이승만이 자기의 말을 모두 들어주겠다고 했으니, 앞으로 수립될 정부에 보다 광범위한 인재등용을 구상하고 있으며 부통령에는 김구를 밀겠다고 말했다. 신익희는 이시영이 다락원에 가 있을 동안의 일들을 설명했다. 국민회나 한민당은 물론, 국회 안에서도 백범 불가론이 크게 대두되고 있으며 앞으로 수립될 정부나 김구 자신을 위해서도 그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시영과 함께 이화장으로 갔던 신익희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이승만이 이시영과 약속한 것은 우선 이시영이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했던 말임을 이내 직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익희는 이승만이 가시 돋친 말을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시영이 약속을 전재한 다음 조소앙을 국무총리로 추천했을 때 이승만은 시큰둥하게 받아넘겼다. 신익희는 두말할 필요 없이 이승만이 성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으며, 조소앙의 국무총리 문제도 재거론이 여지가 없음을 판단했다. 이승만은 이상하게도 국무총리 적임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정부통령 선출을 며칠 앞두고 각 정파에서 국무총리 각축전이 벌어졌어도 그의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국민회에서도 국무총리 자리를 놓고 다시 정당 개편설이 본격화되었다. 국민회 지방 대의원 대회에 대해 일련의 토의를 하고 있었다. 신익희는 이번 대회가 잘못되면 한민당과 마찰의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이승만은 신익희의 얘기를 듣지도 않고 윤 비서에게 대표 한 사람을 들어오게 하도록 지시했다.  신익희는 이승만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지켜보았다. 대표 한 사람이 들어와 국민회의 정당개편 주장과 이승만의 당수직 허락, 국무총리의 국민회 추천 등을 주장했다. 이승만은 간단하게 그 대표를 되돌려 보냈다. 대답은 내일 있을 대의원 대회에서 해 주겠다고 한 것이다.

 이튿날, 그러니까 7월 7일과 9일 양일간에 걸친 부민관에서의 대한독립 국민촉성회 제7차 전국 대표자 대회에서 이승만은 그 일을 분명히 못 박았다. 국민회는 정당으로 개편될 수 없으며 전세계가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7월에 완료할 것이고, 늦어도 8월 15일까지는 정부수립을 선포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그와 같은 이승만의 중대발언은 정계와 국민들에게는 물론, 연합국과 군정 당국을 몹시 놀라게 만들었다.

 아무리 정부수립이 시급하다 해도 국회가 성립된 지 불과 한 달만에 정부수립을 완료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국회는 정부수립에 대한 만발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며 다만, 내각의 인선문제만을 남겨 놓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승만의 단호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정부개편을 시도했던 국민회의 지도자와 지방 대의원들은 그 마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회가 끝난 다음이었다. 신익희는 집단적으로 몰려와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는 그들의 태도에 몹시 불쾌했고, 안 되는 것을 구태여 해보려고 덤비는 그들의 태도에 마침내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승만은 대의원들을 무식하다고 경멸하면서 그런 자들이 대의원으로 있는 이상 앞으로 국민회를 지도 육성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걱정했다. 또한 지금 국회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고 이승만은 개탄했다. 정당이 무엇이고 정당정치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정당정치가 시기상조라는 얘기였다.

 그때 조병옥이 찾아와 매우 중대한 용건이 있다면 이승만과 별실회담을 요청했다. 조병옥은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군정을 아주 폐지하지 않고 계속 정부를 도와 그 기능이 완전히 발휘될 때까지 잠재 존속시키겠다는 사령관 하지의 뜻을 가지고 왔다. 이승만이 들을 턱이 없었다. 그는 정부수립과 동시에 군정의 완전 폐지를 거듭 강력히 주장해서 조병옥을 돌려보냈다.

 신익희는 하지보다 조병옥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는 외국사람이니 그렇다 치고, 누구보다도 정부수립이 시급하다는 것을 잘 아는 조병옥이 그런 제의를 했다는 것은 어이가 없다기보다는 매우 괘씸하게 느껴지는 신익희였다.

 전부터 군정 참여자에 대해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고는 있었으나, 아직 한번도 내색하지 않던 이승만이다. 그는 조병옥이 하지의 그런 전달을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무척 괘씸하게 생각한 나머지 신익희 앞에서 처음 그런 말을 비치게 되었던 것이다. 신익희 역시 그 점에 있어서는 이승만과 동감이었다. 과거의 모든 것을 용서해 준다고 해도 지금의 그런 태도는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조병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하지는 또 한번 이승만이 자기에게 도전적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정면으로 내세워 이승만을 공격할 입장도 아닌 하지는 생각을 바꾸어 이승만을 직접 만나겠다고 말했다. 한국의 장래를 설명해 주겠다는 것이다. 신익희는 이승만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난색을 표했으며 그는 그 사람에게 국회 본회의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어느 국회에서나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가끔 의제와는 엉뚱한 문제를 들고 나와 싸움을 벌이는 꼴을 외국인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신익희가 이승만으로부터 한국위원단에 초청장을 내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을 때, 윤 비서가 들어와 조병옥의 방문을 알렸다. 이승만은 매우 달갑지 않은 기색으로 방문한 이유를 들었다. 조병옥이 다시 별실면담을 요청했다는 말에 이승만은 불쾌한 빛을 보이며 거절했다. 더욱 난처해진 것은 조병옥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의 뜻대로 있다. 이튿날의 국회 본회의에서 유엔 한국위원단을 초청해 놓고 하지를 통렬하게 비난한 것이다. 하지라는 이름은 한마디도 떠올리지 않았지만 그 내용을 보고 받은 하지는 즉시 알아차리고 또 한번 이승만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돌아가는 모든 정세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물론이고 워싱턴 당국까지 이승만의 8․15 정부수립 선포주장을 환영하는 눈치였다. 아무리 자신이 점령군 사령관이라고 해도, 하지는 군정연장 운운할 입장이 못 되는 것이다. 하지는 할 수 없이 한국의 정부수립과 동시에 군정을 폐지는 하되, 정권이양을 지연시켜 계속 자기의 영향력을 과시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는 그와 같은 군정폐지 결정에도 불구하고 정계에는 군정연장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신익희는 그 소문을 듣자 이승만을 찾아가 염려의 빛을 나타냈으나 어찌된 일인지 이승만은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조병옥의 입에서 워싱턴 당국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는 이승만은 타이프라이터가 있는 별실로 갔다. 미국에 있는 임영신을 통해 미국무성에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려는 것이다. 조병옥의 말대로 하지나 워싱턴 당국이 정권이양을 지연시키려 한다면 도저히 좌시할 수 없다고 느낀 그는 분노에 찬 표정이었다. 결국 조병옥은 이승만과 하지의 중간에 끼어 완전히 궁지에 빠지고 말았으며 신익희도 그런 조병옥을 동정해 주지 않았다.

 조병옥은 군정의 정권이양에 대해 하지와 의미는 다를지 모르나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으로부터 하지가 만나고 싶으면 이화장으로 오라는 강경한 말을 들은 조병옥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도저히 하지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익희가 다시 조병옥의 방문을 받은 것은 이승만의 말을 그대로 하지에게 전할 수 없어서 지원을 요청하러 찾아왔을 때였다. 조병옥은 이승만의 태도가 하지를 궁지에 몰아 넣으려는 것이며, 그럴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설명이었다.

  신익희는 하지에 대해 이승만이 그러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승만이 환국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가기 전의 일이었다. 이승만이 하지와의 면담을 요청했을 때 하지는 오만을 부리며 만나고 싶거든 자기 관저로 오라고 했었다. 이승만은 할 수 없이 관저로 찾아가면서 그래도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프란체스카를 동반했었다. 그러나 하지는 프란체스카를 밖에 세워 둔 자동차에서 떨며 기다리게 하고, 회담도 일부러 세시간이나 끄는 오만불손을 부렸던 일이 있었다.

 신익희는 그만 어이가 없었다. 조병옥의 말이 사실이라면 새로 수립되는 정부는 그 출발부터 국민의 기대에 어긋나는 무력한 정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익희는 그 사실을 도저히 간과할 수 없었다. 그는 조병옥과 헤어진 즉시 이승만을 찾아갔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가 전하는 말에도 불구하고 전혀 염려하는 기색이 없었다. 미국에 있는 임영신으로부터 이승만에게 소식이 왔던 것이다. 미군 육군장관과 민정장관이 임영신과 만난 자리에서 워싱턴 당국의 태도를 밝혔다. 대한민국 정부가 8월 15일 수립된다면 남한의 미군정은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전면 철폐할 것이며, 정권이양에 대한 기술적인 기간은 늦어도 3개월 안에 완료한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알게 된 다음에야 신익희는 이승만의 확신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과 하지의 다툼은 이제 하지의 패배로 끝날 조짐이었으나, 그렇다고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하든 이승만이 콧대를 꺾어 놓고 귀국하려는 심산 같았다. 드디어 하지는 매우 교활한 방법을 떠올렸다. 앞으로 군정이 오래 계속되지 못할 터이니 자기들 손으로 한국인의 교육과 건설을 담당할 수는 없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을 잘 아는 딘 소장은 당장 난색을 표했다. 하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딘 소장에게 그 정책을 보다 정확하고 실현성 있게 수립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는 어떻게 하든 애일 강경론자인 이승만의 기를 꺾어 놓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그 어리석고도 유치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하지의 그런 교활한 발상은 미처 정책이 수립되기도 전에 정보가 새나오고 말았다. 그 소식에 접한 국회는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소란해졌다.

 전라북도 완주 출신의 이석주 의원에 의해 제19차 본회의에 그 문제가 공개되었으며, 급기야 교섭위원을 통해 그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소재까지 밝혀야 한다는 제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하게 되었다. 본회의에서 사회를 맡고 있던 신익희는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사회봉을 김동원에게 맡기고 이내 이화장의 이승만에게 알렸으나, 그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이승만을 자신에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승만은 미국에 있는 임영신을 통해 하지의 실책을 모두 워싱턴 당국에 알렸고, 이번의 어리석고 교활한 정책도 이미 알려져 육군차관 드레이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터였다. 이승만은 머지 않아 하지와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의 그런 확신은 곧 현실로 나타나, 끝까지 자기의 고집을 세우려던 하지에게 워싱턴으로 훈령이 내려진 것이다. 한국의 정부수립이라는 골인 점을 코앞에 두고 하지와 이승만의 마지막 신경전이 그런 식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얼굴에 먹칠만 한 격이 되니 하지는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체면을 만회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는 다시 이승만에게 한국인의 장래와 민주정치, 교육 등에 관한 지도를 해 주겠다는 방침을 피력했으나 이번 역시 이승만이 수락하지 않았다. 하지는 분해서 피가 끓었으나 사태가 이미 자기에게 불리해졌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가 이승만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의미에서든 무릎을 꿇은 것 뿐이라 생각하고 친서를 보냈지만, 이승만의 태도는 여전히 냉랭하였다. 신익희는 돌아가는 정세를 유심히 관찰해 본 결과, 하지가 사실상 굴복을 한 지금 이승만이 너무 고집을 부리는 것으로 느껴졌다.

 의장실에서 국회의장단이 간단한 다과회를 베푸는데 하지를 초청했다는 말이었다. 처음 신익희는 속으로 크게 의아해했지만, 거듭 생각하자 이승만의 내심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승만의 그와 같은 태도변경과 하지의 굴복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각자 모두 어떤 복선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신익희의 그와 같은 예상은 적중했다. 이승만과 하지는 서로 만날 자리에서 상대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지만, 나름대로의 속셈이 있었다. 특히 하지는 명예욕을 가지고 있어서, 이승만의 환심을 산 다음 군정에 있던 정무위원들을 대거 정부수립에 참여시킬 작정이었다. 그는 점령군 사령관으로서의 명예를 연장시키기 위해서였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으나 번번히 실패한 그는 마지막 수단을 강구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과 하지의 표면적인 싸움이 일단락 되었을 때, 다시 국회 안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승만이 아직도 양군 철수안을 주장하는 의원들을 당장 국회에서 추방해야 된다는 강경한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그와 같은 경고에 즉각 반발한 것은 한국독립당 계열의 소장 의원들로, 이문원과 노일환은 분노에 차서 국회 부의장실로 달려왔다.

 국회의장이 국회의원에게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며, 대통령이 되기도 전에 그렇게 나온다면 정작 대통령이 되는 날에는 국회의원들을 종놈 취급할 게 아니냐며 마구 흥분해서 떠들고 따졌다. 걸핏하면 국회의원을 국민의 대변자라고 하면서, 자신은 국회를 소유물 다루듯 하는 점이 도저히 못마땅하다는 것이었다. 뒤에 남은 신익희는 말문이 막혔다. 그들이 왜 그러는지, 무엇을 믿고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신익희로서는 소장 의원들의 그런 움직임이 크게 걱정이 되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승만을 잘 알기 때문에 더욱더 소장 의원들이 걱정되는 것이다. 이문원과 노일환 등은 조속한 시일 내에 양군 철수안을 국회에 상정하기로 결정을 보았으나, 이 때 공교롭게도 공산당의 삐라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삐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 조선에서 분할계획을 배격하자!

   ―. 남조선 단독정부를 계속 반대하자!

   ―. 양군 동시 철퇴로 조선통일 민주주의 정부수립을 우리 조선인에게 맡기자!

   ―. 국제 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과 김성수 등 친미자들을 타도하자!

   ―. 노동 임금을 지금의 배로 올려라!

   ―. 모든 정권은 인민위원회에 즉각 넘겨라!

 

 공산당의 이와 같은 삐라는 이문원과 노일환 등 소장 의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경교장의 김구까지도 그들 소장 의원들의 주장이 공산당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점을 걱정했다. 그는 소장 의원들의 공산당으로 몰리지 않도록 엄항섭과 신창균에게 당부했다. 그러나, 노일환 등은 어떤 일이 있어도 양군 철수안을 국회에 상정시키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공산당이 아닌 국회의 입으로 당당하게 밀고 나가겠다는 혈기였다. 그들의 그런 움직임에 대해 신익희는 깊은 우려를 가졌다. 철모르는 아이들처럼 날뛰는 그들이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아 불안하기까지 했다.

 이승만 역시 그들 소장 의원들의 태도를 예의 주시하던 중, 조병옥을 불러 대책을 강구했다. 자리를 함께 한 신익희는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들었다. 국정과 국제연합 한국위원단의 적극협조로 정부수립이 순탄한 듯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양군철수안의 대두와 공산당의 방해공작으로 국내정세는 갈수록 혼란으로 치닫기 시작한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민중들의 시위가 일어나려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4․3사건으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파괴된 제주도에 폭동의 두목 김달삼과 총참모 김성규가 살아남아 한라산을 근거지로 또 다시 나머지 세력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한편 서울에는 북한에 의한 혼란스런 사건들이 계속 이어졌다.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중공계 북로당 거물 성시백이 막대한 공작금을 가지고 서울에 잠입한 것이다. 성시백은 25세때 중국 상해로 건너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자였다. 그는 이미 1946년 12월, 바다를 통해 부산에 도착, 이어 서울에 잠입한 뒤 일차공작 임무를 끝내고 돌아갔으며, 1947년 5월 다시 서울에 잠입하여 특수공작을 수행했다. 성시백은 이번 세 번째 서울 잠입이었다. 그는 다른 공작원들과는 달리 합법적인 무역을 통해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 있었으며, 풍족한 자금으로 미군은 물론 군정 고위관리까지도 친숙하게 사귀어 놓고 있었다.

 이 무렵 제일 먼저 제주도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군정은 폭동진압에 즉각 전력을 다했다. 이 때 국회는 제32차 본회의를 맞고 있었으며, 본회의가 다룰 안건은 정부통령 선거일 결정과 이에 따른 제반 절차의 결정이었다. 이승만다운 생각에 대해 신익희는 투표 전에 일단 전원위원회에서 후보논의를 하겠다고 말했다. 신익희는 이승만으로부터 그런 부탁을 받자 제32차 본회의에서 투표방식에 대한 이승만의 주장을 제의했다. 그러나, 신익희의 그 제안은 심한 반발에 부딪쳤다. 우선 한민당의 허정 의원이 반대발언을 했다.

 국회가 정부통령을 선출한다는 것은 국회로서 가장 중대한 일이며, 그 중대한 일을 그냥 본회의에서 막연히 투표할 게 아니라 좀더 신중을 기하자는 뜻이라는 것을 신익희는 자세하게 설명했다. 노일환은 신익희의 그런 제의야말로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으로 발언을 끝냈다. 신익희의 제안은 여지없이 패하고 그는 사실을 그대로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이승만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는 즉시 윤석구를 비롯한 무소속 의원들을 이화장으로 초청해서 자기의 뜻을 재차 강조했다. 국회의원 가운데  김구나 서재필 같은 인물에게 투표하는 사람이 있을 것에 대비해서 열심인 이승만의 속셈을 신익희는 환히 알고 있었다.

 이승만의 그와 같은 노력에 대해 한독당계와 일부 무소속 의원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국회는 마침내 정부통령 선거를 7월 20일로 정하고 필요한 제반절차를 서두르게 되었다. 그때까지 부통령에 대해 누구에게도 뜻을 밝힌 일이 없는 이승만은 그 후보자를 물색할 단계에 이르렀다. 그는 지금껏 의사표시를 안 일은 없었지만 마음속으로 조만식을 생각하고 있었다. 신익희는 부통령 적임자에 대한 이승만의 의논을 받았다. 그런 문제에 관한 한 신익희는 누구보다 신뢰를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익희가 추천한 성재 이시영의 부통령 선정에 대한 문제는 일단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신익희는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었으나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먼저 불쑥 말하면 이승만이 또 무슨 오해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에도 신익희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새로 구성되는 내각에 참여한다거나, 이승만이 말한 국회의장 자리에 대해서도 전혀 미련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다만 정치생명이 계속되는 동안 자신의 소신대로 일할 생각뿐이었다. 특별히 어느 정당에 가담해서 뛰고 싶지도 않았고, 누구와 다투어 가며 정치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공산주의나 불순분자에 대해서까지 관대하지는 않았다.

 정부수립에 방해가 되는 문제나 인물에 대해서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이승만과 뜻을 같이했다. 정부통령 투표 전에 전원위원회를 열어 후보자를 결정하자는 것도, 예상되는 혼란이나 불상사를 막기 위해 이승만의 뜻에 전적으로 동조한 신익희였던 것이다. 신익희는 이시영의 집을 찾아갔으나 그는 집에 없었다. 다시 다락원으로 돌아간 것이다. 신익희는 그 이유가 전날 이승만이 약속을 어겼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이승만이 자기의 말을 다 들어주겠다던 것만 믿고 조소앙을 국무총리로 추천했다가 거절당한 것을 신익희도 잊지 않고 있었다. 신익희는 그런 이시영에 대해 언젠가 꼭 이승만과 다시 손을 잡도록 해주고 싶었다. 이승만이 자기의 말을 다 들어주겠다던 것만 믿고 조소앙을 국무총리로 추천했다가 거절당한 것을 신익희도 잊지 않고 있었다. 신익희는 그런 이시영에 대해 언젠가 꼭 이승만과 다시 손을 잡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 부통령으로 추천해서 다행히 이승만이 관심을 끌었는데 막상 이시영이 다락원으로 갔다는 소식에 허탈감이 앞섰다. 이시영이 다락원으로 다시 간 것은 정계에서의 은퇴를 뜻하기 때문이었다. 신익희는 이승만으로 하여금 이시영이 정치를 단념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승만은 진정으로 서운해하는 것 같았지만, 그 마음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는 신익희도 알 수 없었다.

 이승만은 적이 원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대통령 당선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부통령 적임자를 찾는 중이었다. 그래서 처음 이시영을 생각했다가 그가 다락원으로 갔다는 소식에 크게 실망한 나머지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4. 대통령 이승만, 국회의장 신익희

 1948년 7월 20일에 국회에서는 재석의원 196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통령 선출의 역사적인 막이 올랐다. 때를 같이하여 경교장의 김구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는 어떤 조건에도 응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해서 그를 추대하려는 의원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개표결과 이승만이 180표를 얻어 안재홍 2표, 김구 1표, 무효 1표로 당선되었다. 이로써 민주정부를 수립하려는 동포의 의욕은 절정에 달했으며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민족 유사이래 처음으로 이 나라에 대통령이 탄생되고 대한민국은 비로소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다. 국회 대통령 선출의 막이 내리자 도하 신문이 다투어 호외를 발행했고, 한국에 와 있는 모든 외국기자들도 이 사실을 자세히 본국에 타전했다.

 이승만이 등단하여 부통령 적임자에 대한 세간의 소문을 일축하고, 국무총리는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뽑을 것이며 부통령은 국회가 선출한다고 못박았다. 그는 부통령 적임자로 이시영과 오세창, 조만식 등 세 사람을 제시했다. 이승만은 이들 세 사람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석과 평가를 암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같은 이승만의 발언은 만일에 있을지도 모르는 김구 부통령 추대에 대한 경고를 내포하고 있었다. 김구 65표, 조만식 10표, 오세창 5표, 장택상 3표, 서상일 1표에 비해 이시영은 113표를 얻어 재석의원 3분의 2에서 2표가 모자랐다. 다시 국회는 재투표에 들어갔다.

 재석의원 3분의 2에서 2표가 모자랐기 때문에 이시영의 당선이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재개표 결과 이시영은 133표를, 김구 62표, 이구수 1표, 무효 1표로 이시영의 당선이 마침내 확정되었다.

 1948년 7월 24일 온 국민이 긴 역사 속에서 처음 맞이하는 민주국가 정부통령의 취임식이 있는 날이었다. 중앙청 광장에는 국회의원 전원을 비롯하여 과도정부 정무위원, 정당과 사회단체의 간부들이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모였다. 단상에는 오색 현수막이 드리워졌고 좌우로 군악대, 시립 취주악단과 예술대학 합창단이 질서 있게 자리잡고 있었다.

 일찍이 단군 성조가 이 땅에 나라를 이룩한 지 어언 반만 년, 그러나 한민족의 역사이래 처음으로 오늘의 행사를 갖는 것이다. 광장 국민들의 가슴은 흥분과 감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윽고 취주악이 울려 퍼졌다. 신익희는 국회 사무총장 전규홍의 개회선포에 이어 개회사를 했다. 그의 감격적인 목소리는 광장에, 전국에 전파를 타고 퍼져 나왔다.  신익희는 국회의장에 당선되어 다음과 같은 취임사를 남겼다.7)


국회의장당선취임사

  이 불초 무능한 사람을 우리 의원동인 여러분께서 버리시지 않고 의장으로 선거하신 데에 대해서는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한편으로 한량없는 송구한 생각을 갖습니다.

  우리 국회가 성립한 이래로 다같이 크게 어려운 짐을 같이 지고 오늘날까지 같이 투쟁해 나려오는 것입니다. 위선 중요한 몇 가지 일을 우리로서 다 같이 지내 내려 왔지만 앞으로는 모든 가지의 큰 짐도 여간 많지가 않을 처지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국회로서 진 임무가 큰 가운데에도 더욱이 의장이라는 책임을 지워주신 -큰 짐을 진 여러분 가운데에도 -좀더 큰 짐을 지워주신 이점에  대하여서는 앞길을 전망하면서 착오나 혹은 원월이 없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에 비상히 송구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일은 한사람 두 사람의 개인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고 우리 전체가 다 같이 공동하게 노력하는 데에서만 우리 일은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나간 시대와 이 시대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인 줄 압니다.

 이런 점에 우리 의원동인 동지여러분께서는 변함없이 다같이 노력을 하시며 다같이 분투하시는 가운데에 여러분 뒤를  따를 때도 있을 것이고 여러분 옆에 있을 때에도 있을 것이고 여러분 앞에 있을 때에도 있을 것이고 여러분과 같이 사명을 달성하고 임무를 수행하려고 합니다. 이 간단한 몇마디 말씀으로 인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마침내 제1공화국 개국(開國)의 날이 왔다. 이승만을 행정부 수반으로 신익희는 입법부 책임자로, 대법원장에는 김병로로 제1공화국은 48년 8월 15일에 수립되었다. 이날 상오 0시, 하지 중장은 군정 폐지를 공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세계 만천하에 선포된 순간이었다.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된 영광스런 건국의 식전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 대한의 독립을 경축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는 역사적 기념식은 성대히 거행되었다. 우리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는 8월 15일 자정을 기하여 파란 많았던 미군정도 폐지되어, 해방 후 3년간 시련 끝에 비록 남한만에서 이지만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회복한 셈이었다. 그러나 신생 정부에는 태동시부터 난관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에 반대하여 조각에 불참한 임정계의 요인들과 이승만의 독선에 회의를 품은 한국 민주당 계열도 문제였다.

 제1공화국 개국 초부터 화합을 이루지 못한 신생 정부의 조각을 염려하고 있던 신익희는 이승만을 방문했다. 신익희는 북쪽과 관련한 조각을 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이승만은 그의 제안을 즉석에서 쾌히 승낙하고, 그 인선을 부탁하였다. 신익희는 초대 평안 남도에 김병연, 평안북도 백영엽, 함경남도 강기덕, 함경북도에 서상용, 황해도 이운 등의 초대 지사 추천을 했는데 모두 이의 없이 수락되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신익희 국회의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뜻을 맞추어 건국의 초석을 다지며 신생국의 주춧돌을 하나하나 놓아 나갔다.


5. 이승만론

  우리는 여기서 잠시 이승만의 퍼스낼리티와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신익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동지적 관계에 있던 시절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정치적 라이벌로 등장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를 좀더 분석적으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오랜 기간을 교우해 왔기 때문에 이승만이 신익희에게 미친 영향을 알아 보기 위해서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이승만에 대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다양하다. 이승만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의 다양성은 그에 대한 호칭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이 박사’ ‘이 대통령’ ‘혁명가’ ‘국부(國父)’ ‘건국의 아버지’ ‘독립운동가’ ‘가부장적 권위주의’ ‘카리스마적 지도자’ ‘독재의 화신’ ‘늙은 독재자’ ‘외교의 귀신’ ‘인사의 등신’ ‘정략가’ ‘고집쟁이’ 등 이승만에 대한 호칭이나 닉네임이 다양하다. 한 사람에 대한 호칭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에 대한 이미지가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의 인성적 측면도 단일화된 분석으로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승만이 다양한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시대적․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의 성장배경은 한말의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었던 시기이다. 거기에다 일본식민지라는 불안정한 정치적 배경이 오버랩 되었던 시기였다. 이와 함께 유교적인 사회적 배경이 여전히 지배적이었다. 더구나 당시로서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미국에서 선진학문을 공부한 배경도 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그의 성장배경과 당시의 어지러운 사회적 배경이 그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를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1) 이승만의 인성적 배경

  정치지도자의 리더십의 형성은 다양한 배경을 통해 형성된다. 그의 성장 배경, 교육 환경, 가족 관계, 시대적 배경, 정치적 배경 등이 리더십 형성의 주요 요인들이다. 이승만의 리더십은 이러한 여러 요인들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은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 그리고 신익희와는 전혀 다른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별성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주변 환경에 의한 요인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성장과정 등에 의해서 형성된 그의 인성적 배경에 의해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이승만은 그의 이름 앞에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 다니지만 박정희에 대한 개인적 닉네임이 별로 없다. 이렇게 두 장기집권자가 갖는 정치적 이미지의 차별성은 결국 인성적 배경을 출발점으로 하는 것이다.

  이승만은 조선왕조의 후예로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교육배경을 보면, 1894년에 배재학당에 입학하고 다음 해에 이 학교 영어교사가 되었다. 그는 국내에서 1904년까지 국내에서 머물다가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루즈벨트(T. D. Roosevelt) 미국대통령을 만나 한국에서 일본의 침략을 퇴치하자는 데 협조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이때 미국에 머물면서 학문에 뜻을 두고 조지워싱턴 대학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1908년에는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10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국”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러한 이승만의 교육적 배경으로 인해 이승만은 ‘박사’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박사이지만 당시에는 드물었던 이러한 학문적 배경이 그를 남다른 이미지를 갖게 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로서는 최고의 학문적 경지에 이르렀다는 ‘박사’라는 호칭이 주는 이미지는 국민들의 의식에 상당한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박사’라는 호칭이 국민들에게는 그를 지식의 상징이나 ‘엘리트’라는 상징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국민들과의 상대적 엘리트 의식은 그에게 정치적 아집을 갖게 하는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미국이라는 선진국으로부터 학문을 연마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갖는 상징성은 독특한 것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귀국하여 YMCA를 중심으로 후학 지도와 시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활동 이후 3․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설립된 한성정부․노령정부․상해임시정부 등에서 대통령, 수상, 총리 등으로 추대되었다. 특히 1919년 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초대 국무총리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제를 주장하고 스스로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사용하여 임정내부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결국 임정의 직제를 대통령제로 고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워싱턴의 구미위원부의 책임을 맡아 외교활동에 주력하였으나 미국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반대에 봉착하였다. 1920년 12월 다시 상해로 건너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임정의 대통령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임정의 활동에 제약을 주었다.

  이승만의 이러한 독립운동 활동과 직책이 주는 배경은 그의 이미지를 확대시켰다. 독립운동가로서, 비록 임시정부이었지만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국부’ 또는 ‘독립운동가’라는 이미지를 심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해방 이후 초대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가 굳어질 수 있지만 이러한 이전의 배경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2) 정치활동과 리더십

  해방 이후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위원회, 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의장, 민족통일총본부 등을 이끌며 정치활동을 하다가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되어 초대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내각책임제를 반대하여 대통령제로 헌법을 바꾸는데 강력한 역할을 하였고, 결국 7월 초대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국에서의 학문적 경험과 생활이 그가 대통령제를 선호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는 아직까지도 권력구조논란이 빚어지고 있지만 이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권력의 핵심에 있는 주요 인사 몇몇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는 1951년 12월 6․25로 피난 와중에서 부산에서 자유당을 창당하였고, 다음해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로 개헌하여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54년에는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강행하였고, 1956년 선거전에서 야당인 민주당 후보 신익희의 급서로 투표권자 56%의 지지를 획득하여 3선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두고 그에게는 행운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역사는 정도(正道)로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1960년 3월 15일 정․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의 승리는 확실하였으나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대규모적인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치인에 대한 탄압과 불법적인 개헌, 장기집권야욕으로 인해 이승만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이른바 ‘3․15부정선거’는 4․19를 불러일으켰고, 이승만은 결국 하야하고 말았다.

  김호진 교수는 이승만의 리더십이 갖는 이미지를 경세가(經世家)라기 보다는 정략가(政略家) 이미지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8) 이승만은 선동과 권모술수에 능하였고, 반공과 안보를 지도이념으로 설정하고 국민동원과 정치탄압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당시의 경제적․군사적 측면에서 열세를 보이고 있었지만 그는 ‘북진론’을 고집하였다.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또한 국민정서를 중시하고 그들과 아픔을 같이하는 배려적이고 표현적인 리더십보다는 국민을 국가목표와 정치권력의 이익의 도구로 이용하는 이른바 도구적 리더십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이 점 때문에 이승만의 리더십은 ‘정략가’라는 이미지를 더욱 강하게 부각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과 배경으로 이승만은 ‘독재자’ ‘권력의 화신’ ‘늙은 독재자’와 같은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권력에 대한 욕구가 그의 시대를 막내리게 하였고,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창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에 형성되었던 긍정적인 이미지는 후에 형성된 부정적 이미지로 그는 ‘국부’로 존중받기보다는 ‘독재자’의 이미지가 더 크게 남아있는 것이다.


3) 이승만, 마키아벨리즘적 지도자상(指導者象)

  이승만의 리더십은 마키아벨리즘적인 요소가 강하였다. 당시 한국은 외세에 의해 해방이 되었지만, 아직은 여전히 봉건 잔재가 남아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에 그는 초대 대통령으로써 전제군주와 같은 통치스타일을 구사하였다. 봉건적인 요소가 강한 사회에서는 적당한 물리력의 행사와 단일의 사회가치규범에 의해서 지배가 가능하다. 그는 자신에 대한 과대 평가와 국민들에 대한 과소 평가로 우월적 리더십을 확보하려 했다. 그는 국민들에 대해서 자신만만하고 당당했다.

  이승만의 정책결정은 대부분이 독단적이었다. 행정기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나 정세분석을 면밀하게 검토하여 참고함이 없이 국무회의 등에서 충분한 토론을 거치는 일도 없이 그의 육감이나 짐작으로 손쉽게 결정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결정을 반대하거나 유보하려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조병옥은 이승만과의 선거 유세전에서 이승만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이 정권 하에서는 지당장관(至當長官), 낙루장관(落淚長官), 여신장관(如神將官)이 있다. 대통령 말이라면 무조건 지당한 말씀이라고 아부하는 장관, 또 무슨 말이 떨어지면 눈물을 흘리고 감격하는 장관, 한 걸음 더 나가서 귀신같이 영득(靈得)하다고 찬양하는 장관들 ․․․․․․”. 이승만의 권력주변 분위기를 시사하는 적절한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은 결국 이승만의 영도방법은 전근대적 권위주의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 마키아벨리즘을 몸으로 실천한 정치지도자라고 볼 수 있다.9)

  더구나 이승만은 미국에서 엘리트교육을 받은 경험으로 인해 자신에 대한 과신이 있었다. 아직은 봉건적 잔재를 털어 버리지 못한 한국 국민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이 받은 엘리트교육과 미국 등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얻은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성향은 어쩌면 당연하였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향이 그의 마키아벨리즘적 성향을 가속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마키아벨리즘적 성향은 결국 그를 하야의 길로 몰고가는 요인이 되었다.

  마키아벨리즘적 지도자의 행태를 보이는 것은 그의 정치적인 경험이 일조를 하였다. 그는 당시 혁명가요 외교가이지 유능한 행정가는 아니라는 평이 나돌았다.10) 그는 정부수립 이전 각국을 돌면서 외교활동을 펼치면서 외교활동을 통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상대를 대하는 방법에 익숙해져 있었다. 상대의 의중을 꿰뚫고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이러한 그의 경험은 당연히 행정보다는 상황과 상대를 이용하는 정치적 술수에 강하게 만든 것이었다.


4) 카리스마적 리더십

  이승만은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문제의 중심이 자신에게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리더십을 강화하는데 주목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카리스마 화하였다. 그래서 그는 선전과 선동에 능한 카리스마적 지도자였다.11) 이승만 정권에서 이러한 예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점이 신익희와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신익희가 자유주의적 정치적 사고를 가졌다면 그는 자기 중심의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북진통일론은 이승만이 자신의 리더십을 카리스마화 하려했던 극단적인 예이다. 당시에 실질적으로 북한을 공격하여 승리할만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이승만이 북진통일론을 국민적 표어로 내세워 주장한 것은 자신의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진통일론은 단순한 대북 정책만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국민들에게 조성되었었던 공산주의에 대한 극단적인 반감과 북한에 대한 증오를 이용하여 현실과 괴리되고 있었지만 북진통일론을 주장할 수 있었다.

  한편 한승조는 정치인을 선동가형과 행정가형으로 분류한 라스웰(H. D. Lasswell)의 유형모델을 기초로 하여 이승만을 선동가형으로 분류하고 있다.12) 즉, 선동가는 애정반감에 대한 갈망이 공공대상으로 전위하여 사회대중의 애정반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집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선동형은 정책 차이를 너무 과장하는 인물로 나타나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은 불충하거나 비겁한 인물로 몰아붙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승만은 자기중심적이고 고집이 세었으며 논쟁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대중의 관심과 박수갈채의 중심이 되기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의 대중연설을 기술한 한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13)

  "그는 연단의 흥분을 즐겼으며 관중들의 진지한 관심과 박수 갈채에 흥분되었다. 이승만은 매우 다양하고 폭넓은 그리고 비상하게 울리고 달콤한 음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신비로운 동양적 무표정과는 정반대로 그의 얼굴과 그의 육체적 움직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는 매우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한국에서 대중연설가로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찍이 연단기술의 마스터가 되었다. 연사로서 그는 지식의 습득보다는 생생한 많은 경험의 소유로 그리고 그의 위엄 있는 연설을 활기 있게 해주는 정열로 더 유명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 당시 사용했던 슬로건은 “대통령은 이승만 박사, 부통령은 함태영 선생으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였다. 해방과 함께 등장한 이승만의 존재는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실체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다만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대중들에게 어필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애국자이며, 민족주의자임을 내세워야 했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각계의 사회단체에 압력을 가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광고를 게재하게 했다. “이승만 출마 환영”이나 “나라 위한 팔십 평생 합심하여 또 모시자.” 그리고 “트집마라! 건설이다.” 등이 그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자신이 아니면 안되는 듯한 환상에 빠져 있었고, 자신만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독단적인 사고는 카리스마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을 국민에게 추앙 받는 국부의 이미지로 연출하는 동시에, 또다른 한편으로는 ‘보릿 고개’라는 말로 상징되던 당대의 경제적 현안을 해결해 줄 유일한 적임자를 자임한 것이다.14)

  올리버(R. T. Oliver)의 말처럼 그는 대중들을 사로잡는 연설능력이 있었다. 또 대중들의 열광과 흥분을 즐기고 있었다. 대중들도 그의 연설에 감정적 동화가 되곤 하였다. 그는 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목소리, 그리고 대중들의 미리 속에서 상상되는 엘리트적 이미지 등이 그들을 감정적 동일화로 이끌 수 있었다. 결국 이승만의 리더십은 그의 원천적 성격과 이미지에 의해 카리스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5) 이미지의 다양화

  앞에서 보았듯이 이승만의 정치지도자로서의 이미지는 스스로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그의 인성적 배경과 당시의 환경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는 초기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긍정적 측면에서 부정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중의 하나는 그가 ‘건국의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였다는 것이다.15) 즉 이승만은 제2차세계대전 종식 직후 전세계가 미․소 양대 진영, 자유민주진영과 공산독재진영 사이의 극한 대결로 정착되어 가는 것을 천리안의 선견지명으로 환하게 빨리 내다보았다는 것이다. 그는 적지 않은 국내지도자들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신생 대한민국을 곧바로 미국주도하의 자유민주 진영에 속하게 하여, 공산주의 북한으로부터의 침략행위를 막아내면서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미군을 비롯한 UN군의 군사적 지원을 재빨리 받아낸 일, 그리고 전후복구를 위하여 막대한 경제원조를 미국으로부터 받아낸 일, 또한 우리 나라에 자유시장 경제발전의 토대를 튼튼하게 닦아 놓은 긍정적인 업적들은 특기할만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가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갖는지는 검증할 수 없지만, 이승만이 집권초기에는 원리원칙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후반기로 갈수록 공직자들의 부패, 부정부패의 만연, 계속되는 정치파동과 정치적 탄압, 불법적인 헌법개정, 구조적인 부정선거, 불법과 비리 등으로 이승만 정권은 ‘못살겠다 갈아보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 등과 같이 권력 말기적 유행어가 급속도로 번져 유행하였다. 이와 같이 이승만의 이미지는 집권초반기와 후반기 이미지가 다르게 변모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그의 개인적 이미지화, 개인의 카리스마화에 따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이미지는 어느 하나에 의한 이미지가 아니라 복잡하고 대중적 이미지를 가졌다 할 수 있다.

 결국 이승만의 집권 전반기 리더십 즉, 당시의 국가적 목표라고 할 수 있는 국가건설과 국민통합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 원칙과 형식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집권후반기로 갈수록 그의 리더십은 권위주의화 하기 시작했다. 가부장적 권위주의로 변화하기 시작한 그의 리더십은 국민의 여론이나 밑으로부터의 의견 수렴보다는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충성스런 심복들의 건의에 더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국왕과 같은 권위로 통치하고자 했다. 집권 초반의 원칙론적인 민주주의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 바칠 것을 강권하는 권위, 위엄 등으로 치장되는 통치스타일로 변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정치학전공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엘리트들이 얻을 수 있는 최고수준의 학벌과 학력을 최단기간 내에 성취하였으며, 이 왕가(李王家)의 후예로 한국독립의 선봉에 서 있었다는 자만과 자신감이 이러한 측면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이승만은 마키아벨리즘적 지도자로써 정치적 술수에 능한 사람이었다.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고, 연장하는데 국민들에 대한 설득이 대부분 술수에 의한 것이었다. 비젼이나 정책제시보다는 기만과 조작을 통한 것들이었다. 당시 대중들의 의식 수준에서 이승만의 마키아벨리즘적 통치술이 적용될만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들을 영도한다거나 정당한 리더십으로는 볼 수가 없다.

 이러한 리더십을 가진 이승만은 신익희가 경무대를 찬탈하려는 의지를 어떤 일이 있어도 막기 위해 유세에 나설 결심이었다. 사실 그것은 신익희의 의지가 아니었다. 도도한 민주화의 물결이었으며, 천부적 주권을 가진 국민들의 의지였다. 또������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민주당이 선거 구호가 지방에서부터 열풍을 일으키더니 드디어 서울까지 몰아쳐 왔다는 현실, 이 불유쾌한 사태가 이승만을 그토록 자극시켰다.

  그의 하수인이었던 이기붕도 같은 입장이었다. 신익희라는 우뚝한 적이 괴이한 훼방을 부려 사태를 불리하게 만들고 있다고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집에 돌아온 이기붕은 자리에 누워서도 구름처럼 운집한 한강 백사장의 청중들 모습이 자꾸 어른거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



6. 민주당의 등장과 반민특위

  건국초기의 복잡다단했던 한해가 지나고 다시 새해가 돌아왔다. 1949년 신년부터 좀더 건전하고 강력한 정당조직이 절실하다는 논의가 한민당의 김성수를 비롯한 일부 지도급 인사들 사이에 대두 되었다. 해공 역시 보다 건전한 보수정당이 시급하다고 생각하고 한민당 김성수 위원장과 오랜 숙원 끝에 그해 2월 10일 한민당과 대한국민당을 통합하여 마침내 민주국민당의 결성을 보았다.

  민주국민당의 최고 위원은 대한국민당측의 신익희와 지청천이 추대되었고, 한민당측에서는 김성수와 백남훈이 추대되었다. 그 뒤 신익희는 신생 민주국민당의 지도운영을 담당하여 그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우리 정당사상 입헌제도 발전에 불멸의 금자탑을 세우게 된다. 신익희가 국회에서 명의장으로 민국당 최고위원으로 활약하던 때에 국내외에서의 갈등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미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반란사건의 폭풍이 한차례 한반도를 휩쓸었는가 하면 이듬해 5월 20일에는 이문원을 비롯한 소장파 국회의원 3명이 좌익이라는 명목으로 구속되었고, 김약수 국회부의장과 10여명의 국회의원이 남로당과 내통했다는 국회 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되는 등 좌우익의 갈등은 그칠 줄 몰랐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제헌국회 내에 설치된 반민특위는 소신껏 친일파 소탕작전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준법정신으로 민족정기를 세우는 기반을 튼튼하게 닦자는 일관된 의도여서였다. 입법부 신익희 의장과 사법부 김병로 대법원장은 말할 것 없고, 특별 검찰부 권승렬 검찰총장들의 합치된 의견에 따라 반민 특위는 서울시경 최운하 수사과장을 구속하게 이르렀다. 이에 불만을 품은 행정부 책임자의 뜻을 믿을 일선 경찰관들이 급기야「6․6 사건」을 일으켰다.

 1949년 6월 6일 경찰이 반민특위 청사를 습격하여 특경대원 등 특위직원 35명을 무차별하게 연행하였을 뿐 아니라 고문까지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권승렬 특별검사부장이 현장에 급히 달려갔지만 오히려 일선 경찰관들에게 무기를 빼앗기는 봉변을 당하기에 이르러「6․6 사건」은 일명 경찰쿠데타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국회의 권위와 법원의 위신이 떨어지는 사태에 이르는 것이다. 반민특위는 김상덕 후임에 이인 법무부장관으로 특별조사위원장을 즉각 교체하여 사태수습에 나섰고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임하게 했으나 결국 미온적인 마무리를 짓기에 이르러 신익희 필두로 입법부의 실망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반민특위 문제는 이미 1947년 7월 4일 남조선과도 입법 의원은 민족 반역자, 친일 협력배,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했으나, 미군정당국이 끝내 공포하지 않아 법률로서 시행하지 못하고, 제헌 국회 때 비로소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특별법을 다루게 되었다.

 제헌 국회는 헌법 제101조의 규정에 따라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을 9월 7일에 압도적으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반민법이 심의되는 동안 반민족 행위자들과 이들의 사주를 받은 일부 정치가들은 법 제정을 저지하기 위해 온갖 만행을 자행하는 등 자성할 줄 모르고 다시 한번 반민족적 행위를 저질렀다.

 신익희는 반민법이 국회에 상정되어 심의되던 8월, 두 차례에 걸쳐 그의 의견을 발표했다. 신익희는 민족 정기를 살리기 위해 반민족적이고 악랄한 친일배들은 마땅히 처벌해야 마땅하나 경미한 죄과를 사람들은 민족의 단합을 위해 용서할 것을 주장했다. 신익희가 반민족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그가 단기 4281년 8월 국회에서 행한 발언을 통해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16)


반민족행위처벌법 토의시 발언


(중략)

  우리는 어떻게 되든지 이 법규(반민족행위처벌법)를 마련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과 같이 한 부분 우리 동포들 사이에는 이 문제를 가지고 많이 정치활동에 이용하고 있는 것을 잘 압니다. 동시에 또 어떤 부분에는 이 문제를 다른 의미로 다른 각도로 이용하고 있는 것 우리가 잘 알아요. 그러나 우리 다대수의 우리 동포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든지 해결해야 되겠다는 것을 다 기대하고 소망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현명하신 우리 동포동지들은 아무쪼록 가혹(苛酷하)고 엄준(嚴峻)하게 이런 문제를 취급해야 되겠다. 개인으로도 소위 성명을 박고 심지어 개인 개인의 실적을 들어서 본인에게도 편지를 주는 동지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대수의 우리 동포들은 이제야말로 우리 국회가 성립되어 가지고 정부가 수립되어 가지고 위선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 사실이에요.

(중략)


  그리고 반민족행위처벌 특별법 토의를 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발언도 하였다. 이를 보면 신익희의 반민족주의자에 대한 견해를 파악할 수 있다.17)


(중략)

반민족행위처벌특별법토의시발언(단기4281년 8월)

  과거의 우리의 생활은 한사람 두 사람의 힘에서 나왔다는 것보다도 우리 전체민족의 슬픈 운명 전민족의 거분(巨憤)으로 30년 40년 가까운 우리의 비참한 치욕의 생활을 전민족의 대국적 그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지내 내려 왔든 것입니다.

  사는 것을 탐내고 죽는 것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의 상정인데 우리 삼천만 동포들이 사실 심화해 가지고 마음으로 적에게 습격 정복하는 현상은 없었다고 할 지라도 다대수는 전수는 그 흉악하고 폭악한 강제 밑에서 살기 위해서 그대로 참으며 그대로 받으며 그대로 하고 내려왔든 것은 우리가 다 같이 뼈가 아프고 살이 저리게 생각한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문제를 얘기 한다하면 다른 데에는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물의가 있지만 본국을 떠나서 30년 40년 동안을 반일투쟁한다 독립운동에 종사했다는 사람들이야 말로 이 문제에 관하여 공정한 의견 합리적 견해를 발표할 것이 특권이라고 얘기할 만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는 줄로 알아요. 그런데 이런 말씀 많이 하지 안는다고 할지라도 우리 위원동지들이 다 잘 아실 줄 아는 바입니다.

  이런 점에 나같이 무사(無似)한 사람의 얘기라 할지라도 우리 의원동지들 여러분이 많이 참고하시면 좋을 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모든 가지의 악랄하고 혹독하든 대국(大局) 속에서 살아 내려오는 우리들이니 만큼 이 반민족행위를 처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우리들이지만 여기에 우리가 다같이 주의할 바는 너무 가혹하다든지 너무 광범위 하다던지 하는 것은 우리가 좀 고려하고 좀 우리가 짐작을 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아무튼 이 반민법이 우여곡절 끝에 본회의를 통과하여 정부에 넘겼으나, 국무회의는 해방 후 4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처단한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우려되는바 적지 않고 혹 이로 말미암아 민심이 정부로부터 이탈할지 모른다는 이유를 내세워 공포를 거부했다.

 그러나 공포를 거부할 경우 문제의 양곡관리 법안과 미곡매상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을 기미가 보이자 부득이 9월 22일 법률 제3호로 공포되었다. 온 국민의 관심 속에 1949년 2월 29일부터 반민특위의 본격적인 활동이 개시되었다. 반민특위가 반민족적 행위를 한 혐의자들을 체포하는 등 과감한 행동을 취하자 언론은 일제히 지지와 찬사를 보냈고, 국민의 성원은 끊인 줄 몰랐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가 당황한 반민족행위자들은 일부 정치가들을 매수해 온갖 방법을 동원 이를 저지하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특히 경찰 고위층에 의해 반민특위 관계자들에 대한 암살음모까지 꾸며지는 판국에 공공연한 압력이 노골화되고 가중되었다. 신익희는 입법부 책임자로서 이에 의연하게 대처하며 입법취지를 살려 이를 실천하도록 노력하였다. 이로써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을 하나의 크나큰 숙원으로 남긴 채 제1공화국의 커다란 주춧돌을 놓아 갈 수 있었고, 신익희는 김병로 등과 함께 건국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



7. 5․30선거와 그리고 한국전쟁

 국회의장 초대 임기를 마친 신익희는 또다시 불어닥친 전국의 선거 열풍에 간여해야만 했다. 제2대 국회의원을 뽑는 5․30 선거에는 5․10 선거 때 불참했던 임시정부 계통 소위 중도파도 이 선거에 적극 가세하였다. 신익희 등의 민국당 인사들은 여당인 국민당의 입후보자들과 마주쳐야 했고, 뒤에는 숙적인 중도파의 추격을 받는 진퇴양란의 어려운 선거를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산분자와 그 동조자 및 중도파뿐만 아니라 민주정보를 약화시키는 개헌론자들에게 까지도 투표하지 말라고 이승만은 유세하였다. 개헌론자는 민국당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여당인 국민당과 정부의 압력으로 인하여 선거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어지럽다 못해 험악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총 2,230명에 달하던 입후보자들이 사퇴자가 속출, 투표일을 1주일 앞두자 2,141명으로 줄어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당시 경찰이 검거한 선거사범 가운데 42명의 입후보자와 178명의 선거운동원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경찰의 간섭 정도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혼탁한 분위기 가운데 민국당에서는 관권에 의한 선거탄압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신익희는 김성수와 함께 경무대를 방문했다. 이승만에게 그와 같은 상황을 시정해 주도록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들 두 사람이 갔을 때 마침 전남지방의 민정시찰을 마치고 돌아 온 이승만은 내무장관 백성욱으로부터 그 동안에 있었던 상황을 보고 받고 있었다.

 그는 이승만의 치밀한 계획에 또 한번 혀를 내둘렀다. 그것뿐이 아니다. 지금껏 자신이 생각해 왔던 이승만의 존재에 대해 일말의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까지 존경해 왔던 독립 유공자 이승만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자신의 이익과 집권을 위해서는 어떤 짓도 서슴없이 하고 낯빛하나 변하지 않는 그런 이승만을 신익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승만에 대한 그런 생각은 김성수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비록 털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똑같은 판단으로 이 나라의 장례를 크게 걱정했다. 자유로운 선거 분위기가 보장되지 않는 한 이승만과 자유당의 장기집권은 누구도 저지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조병옥은 신익희와 김성수가 경무대에 가서 따졌다는 소식에 급히 이들에게로 달려왔다.신익희는 또 한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김성수를 바라보았다. 이승만의 말은 사실이었다. 성북구의 유권자들에게는 조소앙이 공산당이라는 소문이 계속 들려왔다. 그 정도가 아니다. 선거 바로 전날에는 조소앙이 경찰에 이미 체포되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 대신 조소앙은 전국에서 첫 번째로 많은 표를 얻어내며 당당하게 당선되었다. 신익희는 그와 같은 결과에 대해 새삼스럽게 정치 풍토의 한 단면을 느꼈다. 점처럼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헌국회의 임기는 2년이었다. 따라서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1950년 5월에 실시하게 되었다. 당시 정국은 그 후 국회푸락치사건, 내각책임제 개헌안 부결 등 일련의 정치적 사건을 치루는 동안 야당인 민주국민당의 세력이 팽창일로에 있자 이승만은 한 때 차기국회의원선거를 연기하려고까지 꺼려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이승만의 선거 연기에 대한 반대여론이 거세게 일자 결국 제2대 국회의원선거는 1950년 5월 20일에 실시키로 한 것이다.

   이른바 5․30선거는 좌익이 거의 거세되었고, 우익내의 좌파도 크게 후퇴하고, 남북협상파나 중간파도 김구 암살 사건 후에 크게 쇠퇴한 가운데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불참했던 남북협상파와 중간파들이 선거에 대거 참가하였다. 총의석 210석 가운데 모두 2,209명의 입후보자들이 등록하여 10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제헌국회 만큼이나 정치의 열기는 높았다. 이 때도 아직 정당의 기반이 약해 무소속 출마가 1,513명으로 가장 많았고 대한민국당이 165명, 민주국민당이 154명 등의 후보자를 내세웠다. 아직도 정당정치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당시 신익희의 선거구였던 경기도 광주 선거상황을 알아보자. 이 때 경기도 광주에서도 1인 의석에 8명이 출마하여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대한국민당이나 민주국민당은 모두 우익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정당이었으며, 혁신세력이라 할 만한 정당은 사회당과 민족자유연맹 등이었는데 혁신세력은 특히 통일정책에 있어 남북대화를 통한 평화통일을 주장한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양대 우익 세력으로 보수정당인 대한민국당과 민주국민당은 각 당의 주장이 대동소이하였으나 전자는 대통령 중심제를, 후자는 내각책임제를 주장하고 나선 점이 달랐다.

   입후보자 난립으로 가장 치열한 경쟁을 벌인 5․30선거는 후보자를 낸 정당․사회단체도 잡다하여 모두 39개 정당 사회단체가 참가, 이 중 30개 정당 사회단체는 10명 이내의 입후보자를 내고 있었으며 입후보자가 1인밖에 안되는 것도 18개에 달했다.

   결과는 무소속이 126명으로 의석수 210의 3분의 2선을 육박하였고 양대 보수 정당인 대한민국당과 민주국민당은 똑같이 각각 24명의 당선자를 냈다. 그밖에 국민회가 14명, 대한청년단이 10명의 당선자를 냈으며, 대한노동총연맹이 3명, 사회당이 2명, 일민구락부가 3명의 당선자를, 그리고 민족자주연맹과 대한부인회, 불교, 여자민국당에서 각각 1명씩의 당선자를 냈다.

   5․30선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대한미국당의 대표였던 윤치영을 비롯하여 민국당의 서상일, 조병옥, 김준연, 백남훈, 김동원, 백관수, 이영준 등 우익보수계의 거물급 지도자들이 낙선한데 비해 조소앙, 안재홍, 원세훈, 오하영 등 민족주의 좌파 인사와 여운홍, 장건상 등 사회주의 우파계열의 인사들이 대거 진출한 점이다. 여기서 또 한가지 기존정당인 국민당과 민주국민당이 유권자들로부터 외면 당한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경기도에서는 모두 314명이 입후보하여 이 중 30명이 국회에 진출했는데 포천군 같은 곳에서는 20명의 후보자가 난립하여 20대1의 경쟁율을 보였으며 광주군에서도 8명이 등록하여 8대1의 경합을 벌였다.18) 이 선거에서 신익희는 나머지 7명의 후보에 비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그의 정치적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광주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증명된 셈이었다.

   경기도의 경우도 무소속이 압도적으로 많이 당선되어 거의 3분의 2선에 육박하는 19명이 당선되었으며 다음이 대한민국당으로 6명이 당선되었다. 민주국민당은 국민당에 비해 저조를 면치 못했는데 민주국민당 후보자로 당선된 사람은 국민당의 절반인 3명에 불과하고 사회당과 일민구락부에서 각각 1명씩 당선자를 냈다.

 제2대 국회개원식이 1950년 6월 2일에 개최되었다. 이날 오전 10시 임시국회는 신익희를 의장에, 부의장에 장택상과 조봉암을 선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의 사표를 수리하고 그 후임에 사회부장관 이윤영을 임명하였으나 국회는 그 인준을 다시 거부하였다. 이 일로 제2대 국회는 개원초기부터 행정부와 팽팽히 맞서서 화해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비운의 6․25를 맞게 된다. 남북한의 해방과 함께 38선으로 갈라져 사상적 대립이 극대화 된 후 2년째였다.

 그러나 신익희가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얼마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전쟁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이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앟고 있었다. 오히려 북진론을 주장하는 판이었다. 북진론은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여건으로 볼 때 전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다만 대내적 선전용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미국이 남한에서 철수한 뒤에도 당시 국방부 책임자는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식으로 걱정을 통 모른 채 통일을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30분.

 이제 막 동이 트려는 어슴푸레한 한반도에서 갑작스럽게 포성이 울려 퍼졌다. 이 돌연한 폭음에 강과 산이 놀랬고 동쪽에서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공산군의 무력도발에 남한사람들은 무참히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한반도 전역이 북한의 무력 남침으로 한차례 몸을 떨어야만 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이렇게 피투성이 인 채 그 막을 열었다.

 서울의 함락이 눈앞에 놓이자 이날 밤 10시경에 비상 국무회의가 긴급 소집되었다. 신익희 의장은 통탄의 눈물을 삼키며  전쟁상황 보고에 귀를 기울이다가 삼청동 공관에서 국무회의 소집의 연락을 받고 즉각 중앙청으로 향했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에 비마져 쏟아져 내렸다. 간간이 포성이 울려 퍼지고 피난 행렬이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줄을 잇고 있었다.

 그 사이를 달려가는 신익희는 처절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빗물과 함께 흘러내렸다. 국무회의에 참석한 신익희는 침착한 어조로 국무위원들에게 당부했다.


“현재의 전쟁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긴급하게 이 상황을 국민들에게 사실대로 전달하여야 합니다. 민심을 안심시킬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이런 비상사태일수록 더욱더 질서를 지켜 나갑시다.”


 국무회의가 끝난 10시 40분경 신익희는 긴급국회소집을 지시하고 곧장 경무대로 향했다. 새벽 2시쯤 삼분의 이의 성원이 되자 긴급야간국회가 시작되었다.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새벽 5시까지 계속된 회의에서 조소앙 의원의 발의로

‘국회는 정부와 더불어 수도를 사수한다’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수도서울을 끝까지 방위하자는 이 결의안 채택과 동시에 회의가 종료. 국회로 돌아오는 차내에서 신익희는 끝없는 비애와 울분에 사무쳤다. 의사당으로 돌아온 신익희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였다.


“이미 대통령은 남쪽으로 떠났고. 정부 없는 국회만 남아있을 수 없으니 제위들은 정황을 판단 각자 행동을 취하시오.”


 조국산하가 붉은 군홧발에 짓밟힌 지 만 3개월만에 아군과 유엔군에 의해 서울이 적치에서 수복되었다. 기세를 몰아 북진을 계속하고 있던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한 후 10월 중순에는 평양과 원산을 탈환하고 마침내 압록강 연안에 이르게 되었다. 조국통일이 눈앞에 놓인 듯 했다. 그러나 느닷없는 중국군의 참전으로 한국전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북진통일이 되는 줄 알았던 부푼 기대는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고,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눈물을 머금고 다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한반도가 두 동강이 난 채로 끝나버린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는, 북한군의 무력 남침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민주주의 앞에서 예외 없이 무릎을 꿇은 역사적인 기록이었다.

   

8. 5․20선거와 뉴델리 사건

   3년 동안의 전쟁이 끝나고 잿더미 된 폐허에 돌아와서 재건에 몸부림치고 있던 1954년 5월 20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전국에서 203석의 의석을 놓고 모두 1,207명이 입후보하여 평균 5.9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3대 국회의원 선거의 특징은 당시 양대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당과 민주국민당이 처음으로 공천제도를 실시하여 정당정치에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자유당이 공천후보자 181명, 비공천 후보자 61명으로 모두 242명을 낸 데 비하여 민주국민당은 공천후보자 77명만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 때에도 역시 무소속의 후보자 797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외에 12개 정당에서 후보자를 내고 있었으나 단 1명의 후보자만 나온 정당단체가 6개에 이르고 10명 이상의 후보자를 낸 정당․단체는 4개 뿐이었다.

   유권자는 전 인구 20,178,641명의 41.8%에 해당하는 8,446,509명으로 휴전직후였던 관계 때문에 유권자의 등재율이 낮았다. 투표율은 유권자의 91.1%에 해당, 7,698,390이 투표에 참가했으며 이중 97.3%인 7,492,308표가 유효표였다. 선거결과는 자유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고 민주국민당의 참패였으며 이때부터 무소속의 퇴조경향이 나타났다.

  경기도는 모두 32개 선거구에서 902,018명의 유권자 가운데 90.4%인 815,731명이 투표에 참가, 이중 97.4%인 795,227표가 유효표였다. 경기도에서는 모두 104명의 후보자가 나와 23명이 당선, 평균 4.3대1의 경쟁률을 보였는데 당선자는 자유당 16명, 무소속 6명, 민국당 1명으로 자유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군소정당의 퇴조가 두드러져 자유당과 민국당, 그리고 무소속 외에는 단 1명의 당선자도 못내고 있었다. 경기도 광주의 경우, 자유당에서 최인규를 공천후보로 내세웠지만 민주국민당의 신익희를 따를 수 없었다.19)

 1953년 신익희는 나이 60을 맞이하였다. 이순(耳順)이었다. 이 나이가 되면 무엇을 하든 이치에 맞는 행위를 한다는 나이였다. 중후하고 노련한 정치가로서의 채취가 은연중 풍겼다. 1953년 5월 대통령의 권유와 국회의 의결로 영국정부로부터 6월 2일 있을 영국여왕 대관식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을 받은 신익희는 국회 부의장 김동성(金東成)과 출국인사차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했다.

   6․25 전란 만 3년째인 이 해에 신익희는 국회의장 자격으로 6․25 전란 때 우리 나라를 도와준 20여개 국가의 우방국을 방문하여 사례하고 오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익희는 3-4개월 예정으로 5월 18일 비공식적으로 순방할 계획으로 김동성 의원과 출국하였다. 신익희가 출국하자 국내에는 이상한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소위 정치브로커인 김지웅에게서 야기된 「뉴델리 밀회사건」이 터진 것이다.

 김지웅은 함상훈에게 뉴델리 밀회사건을 함상훈에게 전달하였다. 함상훈은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또 모른다. 신익희가 이 나라를 중립국가로 만들려 한다는 말 자체만 해도 날벼락 같은 사실이었다. 놀라는 함상훈에게 김지웅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신익희가 1953년 5월 영국여왕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했다가 귀국하는 길에 뉴델리에서 조소앙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대한민국을 중립국가로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협의를 했으며, 얼마전 북한에 돌아와 있는 조소앙의 밀사가 두 차례나 서울에 잠입해서 신익희와 접선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은 급기야 1954년 10월 28일 함상훈의 성명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함상훈은 <전 민주국민당 당원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 했다. 신익희는 후일 국회 발언에서 이성명을 함씨성명(咸氏聲明)이라고 명명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익희는 뉴델리에서 조소앙을 만나 협상을 했다. 둘째, 1954년 북한에서 밀파된 조소앙의 밀사 오경심이라는 여인을 신익희가 만났다. 셋째, 나 자신도 광화문 모 주점에서 제3세력에 동조할 것을 협박받았다.

 그 문제가 민국당 내에서 크게 문제화된 것은 물론, 국회에까지 번져 급기야는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비약되었다. 어쨌든, 함상훈에게 그런 정보를 제공한 김지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특무대장 김창룡에게도 전달하였다. 김창룡은 오랜만에 찾아온 김지웅을 몹시 반겨 주었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김지웅은 김창룡으로부터 정보제공이란 명목으로 수시로 돈을 갖다 썼으며, 그 대가로 제법 짭짤한 정보를 물어 오곤 했다. 김지웅이 가져오는 정보는 주로 정계의 움직임에 관한 것이었다. 때로는 대공 수사관계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런 김지웅이 오랜만에 찾아와 제공한 정보라는 것은 김창룡에게 있어서 놀랍고도 흥미 있는 것이었다.

 김지웅의 장담에 김창룡은 신익희와 조소앙이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궁금해했다. 그 기회를 노린 김지웅은 우선 신익희가 조소앙과 함께 과거 남북협상을 부르짖던 한독당 출신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조소앙과 40년의 동지적 관계이었음을 강조하였다. 6․25동란 때 납북된 조소앙이 완전히 공산주의자로 몰린 형편이고 보면, 이와 같은 조병옥의 말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에 충분했다. 신익희가 아직 귀국도 하기 전에 뉴델리 밀회설은 민국당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장택상은 신익회와 민주연맹운동에 앞장서서 일하는 서상일을 찾아와 소문의 근원을 따져 물었다. 조병옥은 모든 것을 김준연에게로 전가시키며 자신의 뜻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서상일은 그 문제에 대해 일단 신익희가 돌아온 다음 따지기로 했다. 본인이 없을 때 그런 문제를 가지고 떠들면 민국당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조병옥도 서상일의 그런 주장에 일단은 동의했으나, 함상훈과 김준연은 그 일을 크게 문제삼을 기세였다. 정치적 공세를 위한 좋은 재료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정확한 증거를 갖지 못한 그들은 김지웅을 만나 문제의 밀회설을 확인하기로 결심했다. 김지웅은 이 때 김창룡을 만나고 돌아와 더욱 놀라운 소식을 이들에게 전해 주었다.

 김지웅의 정보는 매우 신빙성이 희박한 것이었지만, 함상훈과 심준연은 똑같이 경악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먼저 정보를 제공한 것은 김지웅이었던 만큼 김창룡의 중공 측 주선 운운은 전혀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단지 김창룡의 내심에는 다른 계획이 있었다. 다음 번 대통령 선거를 놓고 볼 때 이승만의 가장 두려운 라이벌이 신익희이기 때문에 이 풍문을 김창룡은 재빨리 정치적으로 이용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그 소문을 들은 자유당의 이기붕은 그 문제를 즉시 정치문제화 시키기로 하고, 김창룡을 불러 특무대의 견해를 물었다. 김창룡은 그 자리에서 애매한 대답만을 늘어놓으며 민국당에서 나온 정보니 사실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점만을 강조했다. 당시 그 소문이 이승만의 귀에 전혀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입으로는 떠들어댔으나 모두 정확한 정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증거거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에게 제일 먼저 그 소실을 보고한 것은 이기붕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정확한 근거도 없는 일을 정치문제로 삼을 경우 신익희에 대한 공연한 모략이 된다는 이유 때문에 신중을 기했다.

 이승만은 김창룡을 불로 그 문제를 물었으나, 김창룡의 보고는 완전히 반대였다. 그는 조소앙이 그 때 평양에 있었다고 분명히 보고했다. 그것으로 신익희의 뉴델리 밀회설은 경무대 안에서 사실상 진위가 밝혀진 셈이었지만, 김창룡은 일을 계속 문제가 되도록 유도했다. 한가지, 김창룡이 신익희가 이끄는 민국당에 대한 분석을 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이로써 조병옥이 제일 먼저 밀회설을 대두시킨 이유는 분명해지는 셈이다. 이승만은 조병옥이든 누구든 사실이 아닌 일을 조작하여 유포시킨 사람은 법대로 처벌하도록 했다. 그러나 김창룡의 의견은 달랐다.

 이승만이 날카로운 추궁에 김창룡은 궁지에 몰리는 듯 했다. 그러나 조병옥 등 한민당계 보수세력이 당사자도 없는 기회를 이용해 신익희의 정치생명을 끊으려 한다는 김창룡의 예견은 전혀 근거가 없지 않았다. 조병옥과 신익희 사이에는 1953년 소위 민주연맹을 신익희가 구성하려 할 때부터 알력이 있었다. 그때 신익희는 김준연을 만나 제3세력 형성 운운의 출처를 따지고 들었다. 신익희는 이 기회에 제3세력 운운의 뿌리를 뽑으려는 듯했다. 어찌된 일인지 김준연은 오히려 침착하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것이 신익희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 민국당 당사에서 벌인 언쟁이었다. 신익희가 소위 제3세력이라고 맨 처음 퍼뜨린 것은 조병옥이었다. 그는 신익희가 민주연맹 운동에 심혈을 기울일 무렵, 민국당 간부회의에서 그런 발언을 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조병옥의 발언에 대해 적극적으로 신익희를 옹호하고 나선 것은 서상일이었다.

 뉴델리 밀회설에 대해서도 서상일은 신익희를 적극 옹호하고 나섰으나 함상훈은 그렇지 않았다. 또한 민국당은 신익희가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당을 대표하고는 있었지만, 실상은 한민당의 후신으로 주권을 한민당계가 잡고 있었다. 더구나 한민당계의 조병옥과 비주류의 신익희 사이에는 항상 보이지 않게 알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한 신익희와 조병옥의 의견충돌은 1952년 제2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크게 일어났었다. 신익희는 조병옥의 대통령 후보선출을 서두르는데 대해 냉담하게 대처했다.

 민국당에서 대통령 후보에 나설 사람이 없을 경우 이시영이 원하기 때문에 그래도 공천해야 되지 않겠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익희는 이시영과 경쟁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고, 또 조병옥이 이미 이시영을 찾아가 선거자금을 대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 때부터 이미 신익희의 뉴델리 밀회설은 조병옥에 의해 유포될 소지가 있던 셈이고, 그 파문이 점차 정계에 퍼져나가자 쾌재를 부른 것은 자유당 쪽이었다. 자유당에서는 이번을 계기로 해서 이승만의 유력한 라이벌 신익희의 정치생명이 단절되기를 원했다. 특히 김창룡은 신익희가 후퇴하는 것이 이승만에겐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라 믿었다. 그는 김지웅을 만날 때마다 가능한 한 민국당 간부들과 접촉하여 사건을 확대시키도록 종용했으며 일이 잘되면 대통령께 치안국장으로 추천하겠다는 공수표까지 남발하였다.

 김준연과 함상훈도 연일 조병옥을 찾아가 그 문제를 논의하여 신익희가 돌아오기 전에 확증을 잡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했다. 그들은 또한 이번 문제에 있어서 제각기 표면에 나서는 것을 꺼려했다. 만일의 경우 다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익희의 정치적인 역량이 커 감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결국 신익희를 궁지에 몰아 넣으려던 어처구니없는 정치조작극은 동행했던 김동성 의원의 증언을 통해 그 막을 내렸지만, 뉴델리 사건은 이후의 불온문서조작투입사건 등과 함께 늘 신익희를 궁지에 몰아 넣으려는 적들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그의 정치사에 고난과 시련을 강요한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러면 이즈음에서 ‘뉴델리 사건’에 대한 신익희 본인의 단기 1953년 10월 3일 국회에서 행한 1차 해명을 들어 보자.20) 그 내용은 원문 그대로 싣는다. 당시 심각한 정치 쟁점으로 부상했던 뉴델리 사건의 진상을 신익희 본인의 해명을 들어보면 이 사건에 좀더 자세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뉴데리������회담 조작설에 대한 본회의석상 해명선언(제1차)

   내가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이 소위 함씨 성명(咸氏聲明)이라는 것을 근거해 가지고 이 국회에서까지 이 문제를 말씀하게 되었다는데 대해서 우선 먼저 화두의 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 본 의원으로서 퍽 미안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내가 오늘 말씀 할려고 하는 것은 간단히 한 두어가지 토막의 말씀을 드릴려고 하는데 제일 먼저, 오늘 낭독한 회의록에도 다 기술되어 있지만 작년에 본인이 여행했다는 일 이것을 간명하게 말씀할 필요가 있을 줄로 압니다.

  의사록 및 국회의 대속기록에 쭉 계속해서 작년에 내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국회 본회의에 보고한 것과 또 여행을 맞추고 돌아와서 보고한 기록이 국회 속기록에 다 등재되어 있는 것을 나는 잘 기억합니다. 작년 6월 이래 영국 여황대관식을 거행하게 된다는 때에 우리 대통령이신 이박사께서 미리 본인과의 상의도 없이 영국 방면에 연락을 해서 한국에서 보내는 대표로서 그때에 국회의장이든 신익희가 거기에 참가하도록 했다는 말을 비로서 영국정부에서 초청을 받은 후에 이대통령을 맞나  뵈울 때에 알게 되었든 본인입니다.

  이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이대통령을 뫼시고 앉어서 이야기할 때에 그 전에 우리 나라에서 군대를 보내고 의료기구를 보내고 우리 국군장병들과 같이 이전에 파견 작전하고 있는 그 부대의 본국 각 여러 나라를 우리 국민의 대표를 보내서 고맙다는 의사표시를 하자는 국회의 결의가 되었든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와 의논해서 곧 실행할려고 했었지만 당시의 전쟁 형편이나 또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연해서 그때까지 그 결의을 실행하지 못했든 것입니다. 그 일을 잘 알고 국회에서도 책임을 지고 있든 나니만큼 대통령에게 서로 의논하면서 기(旣)히 본국을 떠나서 영국을 가게 되는 길이니 시간을 좀더 허비하고 여비푼이나 좀더 쓰고 보면 국회에서 결의한 것을 다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니 이번 내가 가는 길에 그 사명까지를 아울러 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는 것을 의논하게된 것입니다.

  당시 이대통령께서는 대단히 찬성하시고 대단히 좋은 일이고 국민 대표격으로 있는 국회의장인 당신이 가는 것은 더 말할 것 업이 좋은 일이니 다녀오도록 하시오. 그러나 다만 시간관계가 있으니 물론 외교관계에 정통하신 이대통령이신 지라 사전에 먼 당해국가들의 동의를 받어서 그래가지고 떠나야 신분이라든지 상당한 예의를 국제적 외교전례에 의지해서 받는  법인데 시방 그렇게 할려면 시간이 없으니 외교상 관례로서 ������언오․휘시알������ 비공식으로 다니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씀을 대통령에게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인은 대단히 좋습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읍니다하는 것을 약속하고 그리고 그때에는 우리 정부가 환도하기 전이니까 실상 떠난 것은 내가 기억하건 데 작년 4월 18일 날 하오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국여황 대관식에 참례하는 것이 물론 첫째 목적이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목적이 우리에게 원조를 주고 있는 각 우방들을 찾는 것이 목적인 까닭에 직접 ������런던������으로 향하는 것보다도 미국, 『카나다』를 거쳐서 영국을 들린 후 구라파라든지 그 이외의 국가를 찾는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서 먼저 미국으로 향하게 되었든 것입니다.

  미국에 가서 저의 국민의 의사를 미국정부당국에 표시한 다음 ������카나다������로 가서 그 뜻을 전하고서 다만 그 때에 영국가는 시간이 촉박한 까닭에 ������컬럼비아������만은 ������워싱턴������에  주재하는 그 나라의 대사를 통해서 충분히 간접적으로 뜻을 전한 다음에 영국으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영국서 6월 2일에 대관식을 참관하고 거기에 대한 모든 행사를 위해서 6월 10일까지 ������런던������에 주유한 다음 6월 10일부터 시작해 가지고 ������스칸디나비아������라든지 여러 나라를 찾고 또 이쪽으로 돌아와서 ������베네룩스������라든지 세나라 백이의(白耳義) 화란(和蘭) ������룩센불크������를 다 들려서 서독으로 또다시 불란서로 이태리로 차례 차례 다 본 다음에 다시 희랍 ������터이기(筆者 注, 터어키)������를 방문한 다음에 ������아프리카������ ������에치오피아������를 건너서 내 사명을 완수한 다음 다시 도라서 ������파키스탄������으로 ������아이랜드������ 또다시 돌아와서 ������마니라������ 비율빈(필리핀)을 들려서 대만을 거처서 일본으로 거처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돌아오는 기간은 이 자리에 여러분도 대개 기억하실 줄 압니다마는 작년 9월 18일 서울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때에는 국회나 정부가 벌써  서울로 돌아온 까닭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4월 18일에 부산 수영비행장을 떠나서 9월19일에 서울 여의도비행장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전후 허비한 일자는 넉달이라고 하는 일자지만 돌아다닌 실상의 일자는 영국여황 대관식에 참가하는 일자를 계산하지 않는다고 하드라도 4월 18일부터 6월 10일까지는 민주우방을 계속해서 찾는 시간을 넣지 말고 또 여러분이 대개  상상하시는 비추어서 ������아프리카������ ������에치오피아������ 나라를 도라 다녀오는 것과 당지에 황열병이 라는 전염병이 있기 때문에 예방주사의 효력발생 시간관계도 있고 해서 교통이 빈번한 데에는 하루도 십여 차 수십 차 비행기가 날고 있지만 교통이 비행기가 불편한 지방에 가서는 일주일에 한번 비행기편이 있을까 말까 하기 때문에 이것 저것 해서 ������애치오피아������ 왕래하는 시간에 20일이라는 일자를 허비하였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 마친 다음에 일본에 와서 우리 나라 거유민(居留民)들이 일본에 있는 수효가 대략 7-8십만이라고 하는데 주로 관서지방에 대부분이 거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 대강 수자로 말해서 사십만이나 가까운 다수의 우리 교포들이 관서지방에 산다는 까닭에 1950년, 1951년에 두 차례를 일본을 여행하는 도중에 들리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 나라에 거유하는 우리 교포들 다부분이 살고 있는 관서지방은 한번도 빈말의 위문방문을 하지 못하였든 까닭에 나는 이번 여행 끝에 때마침 국회도 휴회가 되었다고 그러고 또 여행의 기간도 기위 일근 20일에 가까운 시간을 허비하였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후로 ������런던������에까지에 20일 ������에치오피아������ 왕방에 20일 일본에 체류한 것이 20일 가량을 여한다고 할 것 같으면 대략60일가량을 허비하게 되고 실제로 스물여섯 나라를 방문하였다는 시간은 대략 2개월로 종ㄹ하고 돌아 왔든 것입니다.

   이 얘기를 간단히 말씀드리면서 시방 소위 문제가 되었다는 ������뉴데리������ 남북협상설을 운운한다고 하는 얘기에 이르러서는 나 본인이 기억하건데 7월 24일에 ������에치오피아������를 떠나 ������애덴������이라는 해안을 경유해 가지고, 배를 타고 인도양을 건너서 ������파키스탄������ 서울인 ������카라치������에 도착된 것이 7월 24일 이라고 기억합니다. ������파키스탄������은 여러분이 잘 아시지만 ������유․엔������한위에 대표를 보낸 나라이고, 특별히 한국에 동정을 심각하게 가지고 있는 나라인 만큼 거기에서는 ������유․엔������한위에 왔든 대표도 만나고 거기에 우리 나라 교포들이 대략 십수 명이 있으므로 반갑게 만나고, 그 나라 국무총리라는......이름은 잊었읍니다마는 이 사람도 만나기로 약속하였든 것인데 내가 기억하느기에는 25일날 인가에 ������파키스탄������ 국무총리의 청첩(請牒)이 오는데 당신을 특별히 초대하려고 했었지만 바삐.......공교히 인도의 총리������네루������구 매씨������판텟드������......그분은 여러분이 다 아시다 싶이 국제연합총회의 의장을 지낸 사람이고, 전년에 미국의 대사로 있든 때에 미국여행중 반갑게 만나 보았든 연분이 있는 처지이고, ������네루������라는 사람도 중국항전기간에 중국에 있어서도 만나본 사람이고 ,그 몇칠 전에 ������런던������ 영국 여왕대관식에서도 잠깐 만나 본 사람리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카라치������에 와서 환영하는 ������파티������를 하게 되니 특별히 당신까지를 청해 같이 참가하도록 했으나 오시요하는 청첩이 있었든 것입니다. 그러니 손으로 간 사람은 주인하라고 하는대로 하는 것이니까 그 ������파티������에 참여하게 되었에요, 그러니 ������네루������의 남매는 반갑다고 손을 잡고, 인사하고, 여러 사람이 많이 있는 ������파티������니까 자세한 다른 서회(敍懷)는 할 수 없겠지만 대략 나의 돌고 있는 여행의 목적을 충분히 얘기할 뿐더러 여러분이 기억하시자만 인도에서는 우리 나라에 의료기관의 한 부분을 보내고 있든 나라입니다.

  그러니 그것도 특별히 고맙다는 얘기를 표시하며 일기도 덥고, 기위 당신도 여기서 만났으니 내 행정이 예정보다 늦어서 그래서 본국에 돌아가기 심리가 집조(集照)한 까닭에 내가 ������파키스탄������을 떠나서는 내가 시방에는������뉴데리������에 까지 들리실 필요가 없지만 당신 마음대로 하시요마는  나 본인은 여기에서 며칠동안 들리다가 가겠읍니다하는 얘기를 하였든 것입니다.

  26일 아침에 일찍 떠나서 비행기를 타고서 내가 기억하건데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할 때에는 ������파키스탄������이나 인도가 동족의 나라라고 하겠지만 시방 따로 독립된 이후에 이거리가 상당히 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뉴데리������비행장에 도착한 것이 내가 기억컨데 저녁 열한시 반인가, 열두시 가량이였든 것입니다. 일기가 그때 어떻게 덥든지 찌는 것과 똑같은 더위에서 그 비행장에 가니까, 승객들이 다 내리고, 물어  보니까 비행기는 ������개소린������으로 기인(基因)해서 한 삼십 분 지체한다는 것입니다.

   여행을 떠나는 처음 날부터 내 몸의 그림자의 관계와 같이 잠시 초각(初刻)을 떠나지 않고, 동행하는 金東成 의원......그분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분이지만 외국말에도 응통하신 분이고, 여러 남미 구라파 각 나라를 대한민국의 사절로서 많이 여행하든 경험이 있는 분입니다. 같이 의원동지 뿐만아니라 김동성의원은 일찍이 부의장으로 같이 일하고 있든 특수한 관계도 있고 또 나의 부족한 면이 많은 사람으로 나를 도웁는 의미로서 같이 가자는 것을 약속했고 작정해서 같이 갔드니 만큼 그 분과 같이 ������뉴데리������ 비행장에서 내리면서 내가 말하기를 여보 어제 같이 ������네루������를 만나서 얘기했고, 일기도 이렇게 덥고 또 우리끼리 얘기지만 인도에 대한 나 개인의 생각뿐만 아니라 우리 전체국민동포들이 그렇게 찐덥고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처지요, 나부터도 ������네루������본인에 대해서도 그렇게 좋은 호감이 없는 사람일뿐더러 여러 가지로 보아서 우리 뜻만이 전달도 되있으면 고만이니 우리 길이 바뻐...그러니 우리 여기에서 잠깐 쉬어서 타고 온 비행기를 다시 타고 우리는 ������타이랜드������ 서울이 ������방콕������으로 내려가야 할 것이니 어떻소? 내 의견이 그려소! 그러니 김동성의원도 그것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그러나 나는 ������뉴데리������를 잠시라도 구경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여보 고만두고 갑시다......그렇게 얘기를 하였든 것입니다. 그래 비행장에 잠깐 들려서 날은 덥고 하니까 음료수 두 잔인가, 한 병인가를 먹고, 비행기에 ������깨소린������을 다시 채운 다음에 ......비행기표로 말할 것 같으면 ������라운드․바리이������하고, 어디서 어디까지 짤러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이니 만큼 그것은 비행기의 ������캅텐������이나 ������싸빈������들에게 얘기만 할 것 같으면 우선적으로 타는 권리가 있었든 것입니다.

  그러니 물론 그 비행기로 다시 올라 앉어 가지고, ������방콕������ 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방콕������에 도착된 것은 이튼날 상오 7시인가,8시에 ������방콕������에 도착되었든 것입니다. 이만큼 나는 말씀을 하면서 소위 조소앙하고 ������뉴데리������에서 만나봤다는 얘기는 내가 내종에 얘기를 들으니 내 일본에 와서, 본국에 도라오기 전부터 어느 한 모퉁이에서 얘기가 ������이번 국회의장 신익희가 세계여행을 하고 도라오는 길에 ������뉴데리������에서 만났다는 소문이 있다.������ 그런 얘기가 들렸다는 말을 작년에 들은 것이 아니라 아마 내 본인은 금년 봄엔지 그런 얘기가 돌았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형편이니깐 여러분이 다 아실 뿐만아니라 국내 국제 나를 아는 사람.....신익희라는 사람하고 조소앙하고는 40여 년의 동지적 관계가 있었고 독립운동에 있어서 임시정부라고 라는데에서 삼십년 가까운 동안을 같이 희생을 하는 사람입니다. 학생시대에 ......동시대에 일본에서 같이 공부했다는 것은 물론이고 이와 같은 친분이 있는 사람이지마는 소위 1948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처음으로 총선거가 시작될 때에 단선단독(單選單獨)은 반대를 하느니 남북협상을 해야 하느니  되지도 않는 계획과 의견을 가지고 돌 때에 한 차례 뿐만아니라 여러 차례 나무라고 다툰 것이 역력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와 같은 형편일 뿐 더러 여행을 통해서 조소앙을  생각해 본 일도 없고 꿈꾸어 본 일도 없고 만나 본 일은 더군다나 없고 ......이러한 형편입니다(笑聲).

  이것을 나는 소위 얘기되었다고 하는 데에 말씀을 드리도록 하고 더군다나 요사이 형편에 있어서 소위 제3세력 운운이라든가 또다시 남북경협 운운이라고 하는 얘기가 나는데 이르러서는 나도 불소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마는 제따라 육십여 평생을 적어도 사십여년 동안을  나라를 위하고 민족을 위해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데에 내가 무엇 잘 났다고 영도하고 앞에서 일했다는 신념은 없읍니다마는 동지의 뒤에 따라 다니든 자의 하나입니다.

  이러니 만큼 본국에 돌아온 이후 에 오늘날까지 자기 개인으로서는 우리 대한민국을 건립하는 뚜렷한 세 가지의 일 제일 먼저 공산당을 반대하는 투쟁 소위 반공투쟁 ....... 잠시동안이 일이리 할지라도 참 국제적으로 우리 나라 운명 좌우하게 되었든 소위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투쟁 이것을 말하기를 반탁의 투쟁...... 이것은 반대하는 투쟁에 끝쳤지만 적극적 의미로서 대한민국을 건립하는 오직 한가지의 올바른 길 민주주의 원칙에 의지한 총선거로서 나라를 세워야 되겠다는 이 일에...., 세 가지 일에 뚜렷한 공로는 없는 나입니다. 그렇지만은 국내에 있는 우리 동포 동지 정확한 의견을 가지고 일하고 싸우고 있는 여러분 뒤에 따르면서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사람에 하나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제넘게 자기에 견해...... 생각을 약간 말씀한다고 하면 공산당이 무엇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된다는 얘기를 좌담으로나 강연으로나 나는 여러 수십년 동안을...,  특별히 본국에 돌아온 이후에 게을리 아니하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공산당...... 공산당이라는 것은 ������레-닌������일가 죽었을 때에 ������스탈린������이라는 자가 얘기하였든 것과 마찬가지로 특수한 종류들이란 말이에요. 특수한 종류에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내일 모래 찌부러지고 엎어진다 하드라도 소위 세계를 공산화하고 국가 ...... 국가를 관계한다고 보면 위성국가를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 공산당의 유일한 목표이고 목적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슨 방법이든지 무슨 수단이든지 다 쓴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민족주의 탈도 쓰고 때로는 중간파의 탈도 쓰고 때로는 민주주의자의 탈도 쓴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독립운동에 관계하고 내려오는 나이니 마큼 계속해서 삼-사십년동안을 적은 일에서나 큰일에나 다 체험하고 내려오든 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얘기가 어떻게 있든지 공산․민주 양대 진영의 대립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문제가 아니고 절대적이라는 말을 나는 나 개인의 ������못도������로 내세우고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작년 여행을 통해서도 명국의 당국자들을 만나서 얘기할 때에 한국의 통일 문제 한국의 휴전반대라는 문제 때 마침 일어났던 애국포로들을 석방한 문제 적어도 간명하게 이 세가 지 문제에 있어서는 내 딴은 내 수족이 닿는 나라에는 명백하게 다 설명하고 다니든 나입니다.

   거기의 한마디 말을 인용한다면 ������어떠한 한국 사람이 남녀를 물론하고 피 안흘리고 목숨 희생 아니하고 편안하게 앉아서 평화롭게 우리 나라가 통일되는 일이 가능하다면 반대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롭게 공산도배들하고 한국의 통일문제를 평화스럽게 의논해서 잘 하겠다고 하는 이 일을 한문말로 호랑이를 앞에 놓고 가죽 얘기를 하는 것과 같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라������ 하는 말을 내가 했든 것입니다. 이 말은 동방에 설명식이라고 해서 우리들은 말하기를 ������여호모피(與虎謀皮)������라는 한문 문자는 대강 한문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지마는 구라파 사람이나 미국사람들은 처음 듯는 얘기라고...... 호랑이를 앞에 놓고 호랑이 가죽 얘기를 하는 것은 재미있는 얘기다 가능성이 없다고 하는 얘기가 재미 있다고 웃으면서 과연 그렇다고 하는 얘기를 교환하는 기억이 있고 오늘 날도 우리 국토의 통일 없이 우리가 살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다 같이 알아요.

  하지마는 평화롭게 앉아서 얘기를 오군 조군 하게 해서 우리 나라도 통일되겠다는 것은 꿈을 꾸는 어리석은 사람의 잠꼬대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은 내가 대표하는 당의 동지들하고 이야기 하는 것이 한 두차례가 아니요 본국에 있는 동포들하고 이야기한 것은 한 두차례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나의 개인 생각일뿐더러 우리 전체의 민국당의 당원동지들을 내가 엄히 믿어서 이 자리에서 명백히 말씀하지만 한사람도 내 의견을 이의를 가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삼세력이니 남북협상이니 운운(云云)은 최근에도 북쪽에서 괴뢰도배(傀儡徒輩)들이 방송을 통해서 이러니 저러니 이야기 한다는 말을 내귀로는 듣지 못했지만 들었다고 하는 동지들의 이야기를 전위하는 것을 듯게 될 때에 우리는 중립을 하느니 무엇을 하느니 말하는 소리가 돌아 다니는 이때에 우리들은 공산당이라고 하는것이 무엇인가 새삼 스럽게 한번 다시 알어야 될 것이고 공산 민주 양대진영의 대립의 관계는 상대문제가 아니라 절대문제라는 것을 한번 다시 알어야 된다. 이말은 소위 함씨 성명이라고 하는 이 글발의 주인인 함상훈..... 이 때까지 민주국민당의 성공의 하나이고 간부의 하니였든 이 사람이지만 같이 앉어서 이야기 할 때에도 내가 이 이야기를 한 것이 한 두차례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 형편을 나는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서 내 개인의 생각과 또한 내가 대표하고 있는 민주국민당의 전체의 당동지들이 주장 의사가 어디에 있다는 것만은 나는 감히 전체임을 지면서 이 자리의 여러분께 말씀을 드립니다. 이것으로써 나는 간단한 말씀을 마치기로 하고 뒤이여서 함씨성명에도 인용이 되었을 뿐아니라 주로 오늘 국회의 본회의 의사일정에  남북협상������뉴-데리������ 회담설까지 나오게 된 이 일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끝으머리에 붙여서 북쪽에서 넘어온 자들은 무슨..... 하나 뿐만 아니라 둘이니 셋이니..... 또 만나보고 더구나 정치자금을 운동할려고 하였다는 이야기는 생각이 좀 다른 사람 좀 복잡한 사람 특별히 북쪽의 모든 가지 일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을 남유달이 잘 알고 있는 사람들  혹  유념할지 모르지만 나같이 단순하고 무식한 사람은 북쪽에서 되어가는 것을 알고 싶어하지도 않어요.    왜? 나는 내 생각에 잘 아는 까닭에 무엇이라고 떠들든지 ������공산당은 특수한 종류������이 다하는 것을 나는 잘 알어요. 그런 까닭에 도저히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한 일이고 파닥찌도 못 본일이고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것만을 내가 말씀하여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맨 끝으로 이러한 문제로서 여러분이 관심을 하시게 되고 또한 우려를 하시게 되며 또 본회의에까지 상정이 되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는 것만은 거듭 미안하고 거듭 유감입니다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7. 한국 정치사의 오점,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

 1954년 11월 29일 자유당 정권은 마침내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노리는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안 통과 여부에 집중되었고 자유당은 개헌안을 통과는 시간문제라고 여겼다. 야당은 야당대로 약세를 변치 못했으나 이 정권의  영구집권만은 막아보려고 피어린 투쟁을 전개했다.

 마침내 12월 27일 온 국민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개헌안은 표결에 들어가게 되었고 원내의 험악한 분위기 속에 오후 4시 15분에 투표가 시작되었다. 투표가 완료되고 마침내 개표까지 모두 끝마쳤다. 개헌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국회 재적위원의 3분의 2선인 136명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가능했다.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했고, 최순주 부의장이 개표결과를 발표하려고 국회 단상에 올라섰으나 그의 얼굴엔 침통한 표정이 가득했다.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로 이번 개헌안은 부결되었습니다.”


 최 부의장이 맥없이 의사봉을 두드리자 야당 당석에서는


 “만세! 민주주의가 오늘 비로소 승리했다.”


 며 기쁜 함성이 터져 나온 반면 이기붕을 비롯한 자유당 의원들은 얼굴만 붉힌 채 의사당을 빠져 나왔다. 그날 밤 맥없이 이승만을 찾아온 이기붕을 향해 이승만은 개헌을 위한 재적 의원 3분의 2선이 안된 것에 대해 이기붕을 질책했다.

 이기붕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서는 개헌안 부결에 대한 결의를 뒤집기 위해 전략을 세웠다. 곧바로 정부는 공보실장 갈홍기와 자유당 황성수 선전부장 명의로 ‘사사오입에 의해 개헌안은 통과되었다’는 설명을 발표하게 했다.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은 헌법상 대통령3선 금지 조항으로 인해 더 이상의 권력유지가 어렵자 이승만은  1954년 11월27일 초대대통령에 한하여 3선 금지조항을 삭제하는 헙법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투표에 들어갔다. 표결결과 재적의원 203명, 출석인원 202명, 찬성 135명, 반대 60표, 기권 7표였다. 헙법개정에 필요한 의결정족수는 203명의 2/3인 136표이므로 부결된 것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자유당은 203명의 2/3은 135.333․․․․인데, 영점 이하의 숫자는 1인이 되지 못하여 인격으로 취급할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하면 135이며, 따라서 의결정족수는 135이기 때문에 헌법개정안 의결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튿날 자유당은 여당이 불참한 가운데 번복 가결 동의안을 상정하고 국회에서 통과 시켰다. 이른바 ‘사사오입개헌’으로 말미암아 헌법은 한국정치에서 권력연장의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모든 이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여론은 다시 웅성거리고 있었다. 국회는 11월 29일 오전 10시 술렁대는 분위기 속에서 제91차 본회의를 개최하였고 27일 사회를 맡았던 최부의장이 한국정치사에 오점으로 남는 사사오입 개헌을 선포한다.


“지난 27일 제90차 본회의에서 개헌안이 통과되지 못했던 것은 사회자인 본인의 실수였습니다. 135표가 정족수임에도 불구하고 계산착오로 인해 부결을 선포했습니다만, 오늘 이를 정정 취소합니다. 다시 개헌안은 통과된 것으로 선포합니다.”


 하고는 의사봉을 두드리고 통과시켰다. 의사당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고 분위기가 점차 험악한 양상을 보이자 여당의원들은 재빨리 산회해 버렸고 당황한 나머지 개헌안 통과를 공포했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의 3선 출마의 길이 열려 자유당으로써는 영구집권을 획책할 수 있게 되었으나, 결국 이승만과 그 추종 세력이 무덤을 파 놓은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1) 최한수, 『한국선거정치론』,(서울 대왕사, 1996), p. 296.

2)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한민국선거사 제1집』, (서울 : 보진재, 1981),  pp. 71-72.

3) 정해구, "한국정당정치의 형성과 왜곡 : 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 안희수(편저),『한국정당정치론』,(서울 : 나남 , 1995), pp. 234-238.

4) 정해구, 앞의 논문, p. 243.

5) 최한수, 『한국선거정치론』, pp. 297-298.

6) 신익희 이후 광주에서 무투표 기록을 세운 것은 1996년 실시된 6․27지방선거에서 박종진 광주군수를 무투표로 당선시켰다. 광주에서 무투표 당선이 잦은 것은 이 지역의 정치적 성향과 밀접하다. 보수적이고, 전통성이 강한 광주는 지역에 대한 애착심이 강하고 지역주민들간의 심리적 연대가 견고하다. 이러한 측면이 선거 때 지역 출신 가운데 유능한 인재가 있으면 무투표 당선이라는 정치적 결정을 낳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7) 신창현, 『해공 신익희 연설문집』p. 17.

8) 김호진, “역대대통령의 유형,” 신동아 1월호, 1994,『한국의 파워엘리트』 pp. 61-62.

9) 한승조, 『한국정치의 지도자들』(서울: 대정진, 1992), p. 91.

10) 이원순, 『인간 이승만』 (서울 : 신태양사, 1995), p. 358.

11) 한승조, 위의 책, p. 98-99.

12) 위의 책, p. 98-99.

13) 위의 책, p. 100.에서 재인용.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New York: Dodd Mead & Co., 1954), p. 151-152.

14) 박종우(외), 대통령도 팝니다 (서울 : 두리, 1991), p. 209-210.

15) 김상엽, “역대대통령의 통치성적표,” 신동아 1월호, 1994, 『신한국의 파워 엘리트』, p. 66.

16) 신창현, “반민족행위처벌법 토의시 발언”, 『신익희 선생 연설집』, pp. 17-18

17) 신창현, 『신익희 선생 연설집』, pp. 21-23.

18) 당시 광주군 선거구의 입후자와 당선자, 그리고 득표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성  명

연령

소속 정당단체

득표수

신익희

59

민주국민당

29,525

강태인

48

무소속

3,605

이강목

29

3,050

김낙규

57

493

안재정

48

국민당

471

선정식

63

무소속

446

이창선

44

유도회

330

구성서

56

무소속

사퇴

자료출처 : 『광주군지』, p. 1135.

19) 당시 선거 후보자와 득표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성명

연령

소속정당

득표수

신익희

59

민주국민당

24,218

최인규

35

자유당

18,712

강태인

50

사퇴

  자료출처 : 광주군지, p. 1139.

20) 신창현, 『신익희 선생 연설집』, pp. 386-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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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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