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월 2일 - 뤼순의 러시아군, 일본군에 항복



1905년 오늘, 뤼순(旅順)을 수비하던 러시아군이 일본군에게 항복합니다. ‘20세기의 문을 연 대전투’로 기록된 뤼순 전투는 러일전쟁당시 가장 격렬한 전투 중의 하나였습니다.



요동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뤼순은 군항의 필수 요소를 모두 갖춘 천혜의 항구로, 여러 세기 동안 부동항을 애타게 찾아온 러시아에게는 보석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1898년에 청나라로부터 이곳을 조차한 러시아는 뤼순을 ‘포트 아서’(Port Arthur)로 이름 붙이고 요새화된 군항으로 개발하죠.  중국대륙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려고 러시아와 전쟁까지 불사했던 일본이 뤼순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습니다. 이곳을 빼앗지 못한다면 해전에서 일본 함대가 불리해지고, 대륙으로 진출한 육군에 대한 해상 보급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기 이었죠. 이 전쟁이 시작된 곳도 바로 뤼순이었습니다.



1904년 2월 8일 밤, 일본 해군은 뤼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선들에 대한 기습 공격으로 전쟁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4월 하순 한반도에 상륙한 일본 제 1군은 5월초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과 봉황성을 함락시켰죠. 5월 5일에는 뤼순 부근의 남산도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집니다. 8월 28일부터 요양에서 벌어진 양군간의 전투에서는 일본군 13만, 러시아군 22만이 맞붙었는데 일본군이 가까스로 승리합니다. 이제 전투는 뤼순을 중심으로 벌어집니다. 뤼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반드시 격파해야만 하는 일본의 절박함 같이 러시아 입장에서는 뤼순을 지켜내야만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올 발틱 함대에 대한 지원이 가능할 것이고, 선제공격으로 수세에 몰린 전황을 일거에 타개할 희망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죠.

뤼순 전투에 동원된 일본군


당초 일본 육군은 1주일이면 뤼순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습니다. 8월 19일부터 ‘노기 마레스케’ 대장이 지휘하는 일본 제 3군이 뤼순 요새에 대해 대규모 공세를 벌입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무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군 보병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러시아군의 토치카와 참호선 앞으로 달려들었지만, 몇 정의 기관총 앞에 엄청난 사상자만 낳고 말았죠. 항구 주위의 고지들을 공격하는 동안 수많은 일본군들이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8월과 10월에 있었던 2차례의 총공세에도 러시아군의 방어선은 뚫리지 않았습니다. ‘일장공성 만골고’ (一將功成 萬骨枯, 한 사람 장수의 공은 무수한 병사의 희생 끝에 이루어진다)는 고사성어가 무색할 만큼 일본군의 희생은 심각했습니다.



11월 26일, 일본군의 3차 공세가 시작됩니다. 공격의 방향은 여순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후석산 산정의 해발 203m의 고지였습니다. 일본군은 11월 28일 단 하루 동안만도 8천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악전고투합니다. 일본군의 엄청난 사상자는 객관적 조건을 무시하고 정신적인 면만 내세웠던 지휘관들의 무리한 용병술에도 기인했습니다. 공업생산력이 군수품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 입장에서는 인명보다 물자를 우선시했기 때문에(인명을 경시하는 일본군의 고질적인 병폐는 이후에도 되풀이됩니다), 별다른 전술이랄 것도 없이, ‘돌격 앞으로!’가 남발되었던 것이죠.  하지만 보급선이 차단된 채 뤼순요새에 고립되어 있는 러시아군의 사상자도 늘어만 갑니다.        

뤼순 공방전의 일본군 지휘관 '노기 마레스케' 대장

거듭되던 실패 끝에 12월 5일 일본군이 ‘203 고지’를 점령합니다. 고지를 손에 넣은 일본군은 산 정상까지 중포를 끌고 올라와 항구에 고립된 러시아군에게 포격을 가하죠. 러시아로선 고지를 일본군에게 빼앗긴 것이 치명적인 손실이었습니다.  12월 29일, 뤼순의 러시아군 사령관 ‘아나톨리 미하일로비치 스테셀’ 장군이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절망적인 보고를 합니다. “포탄이 거의 떨어졌고, 괴혈병이 창궐하고 있음. 총을 들 수 있는 병력은 1만 명 정도인데, 그들 대부분도 병에 걸렸음”이라고 말이죠. 해가 바뀐 1월 2일, 마침내 155일간의 혈전 끝에 러시아군은 백기를 들고 맙니다. 뤼순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28,200명, 일본군의 사상자는 57,789명에 달했습니다. 승리한 쪽이 패배한 쪽보다 2배나 많은 사상자를 내었던 것이죠. 일본군 지휘관 ‘노기 마레스케’ 대장의 두 아들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노기’ 대장은 1910년 ‘메이지’ 일왕이 죽은 다음날 처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패장인 ‘스테셀’ 장군은 러시아로 송환되어 ‘발틱 함대 도착 시까지 뤼순 요새를 사수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한 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4년간 복역한 다음, 홍차 행상을 하며 시베리아를 떠돌다 객사합니다. 후일 레닌의 말대로 뤼순전투는 러시아 ‘짜르 체제’에 종말을 고하는 대사건이자 1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전주곡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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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itz 2009/01/02 13:55 R X
지난 여름 러일전쟁사를 읽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참호전과 기관총의 위력이 여실히 드러났던 전투라고 하던데.. 일본군이 종국적으로 승리한 전쟁이긴 하지만
버텼던 러시아군도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capa1954 2009/01/02 17:11 X
대륙의 노회한 제국 러시아와 신흥 제국주의 세력인 일본의 일대격전은 동시대인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동양의 섬나라가 유럽의 대제국과 맞짱떳다는 사실은 아시아의 일부 지식인들을 흥분시켰죠. 중국의 손문이 통쾌해했다는 이야기며,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던 장지연이 '백인종에 맞설려면 황인종은 일본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글을 썼을 정도니까요. 뭐, 장지연이 친일인사 명단에 올라가 있긴함니다만, 일본의 승리는 당시로선 일대 쇼크였던 것 같습니다.
흠흠.. 2009/01/02 16:28 R X
짜르 니콜라스 2세는 점증해가는 사회적 욕구를 힘으로 억누르는데 러시아 정교회 신부들을 동원해 어용노조를 지도하고 감시하는 방법의 경찰사회주의도 그 중 하나입니다. 센트 피터스버그 푸틸로프 기관차 공장에서 발생한 노동자의 해고문제로 발단한 시위는 신부 가퐁에 의해 지도되고 통제되는 데 가퐁은 노동자들의 진심에 마음이 흔들리고 지휘체계를 뛰어넘어 짜르 니콜라스에게 직접 호소하고자 했고 황제의 동궁을 지키는 수비대는 발포로 응답합니다. 진홍색 황실 군복의 코사크 기병대는 칼과 채찍을 휘두르며 잔혹하게 진압하죠. 가퐁은 망명합니다. 그게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사건입니다..

당시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단선으로 운행됩니다. 유럽 중심의 러시아 육군은 열차로 병력을 호송하고 기관차를 버리지만 일본군에 맞서 제 때 병력을 배치하는 데는 실패합니다. 중국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중국 땅 여순에서 벌어진 러시아와 일본군의 전투를 참관한 서방의 한 지휘관은 ‘형편없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는데도 불구하고 고립된 상태에서 백기를 들고 맙니다. 그 후 지구를 반 바퀴 돌아온 구로파트킨의 발트 함대 역시 대한해협에서 도고에 의해 바다 속으로 수장됩니다. 두 개의 러시아라 불리며 내부 혼란과 싸워야할 모순된 러시아가 내린 결정이죠. 그 결정으로 청조에 이어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러시아의 패권은 일본의 손에 넘어갑니다. 포츠머스 회담에서 일본이 얻어낸 것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민족의 가혹한 운명이었습니다. 그림 속의 용맹한 일본군들은 조작된 것이며 군신이라 불리는 명치시대의 노기는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딛고 올라선 거죠. 그조차 강요된 희생일지 몰라도 그나마 봉건관념 忠으로 맹세한 장수답게 자신의 아들까지 희생할 수 있다는 점은 노기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다르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2009년의 첫 날 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capa1954 2009/01/02 17:15 X
러일전쟁을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노기'장군과 '도고'제독...지금도 일본 보수사회에서는 군신으로 추앙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제 시대때 '노기'를 모신 신사가 서울 남산 어느 언저리에 있었다고 하더군요. 흠흠..님께서도 올 한 해, 늘 건강하시고 소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시길 기원합니다.^^
지나가던이 2009/01/03 00:59 R X
203고지 전투 때 하도 병력손실이 많아서 전후 유족들이 항의차 노기대장이 도착하는 기차역에 몰려있었는데 자기아들 유골함 2개를 들고 나오자 유족들이 노기를 껴안고 울었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군요. 이런 일화도 있고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제국이 열강에 편입되는 신호였기에 노기가 군신이 될 수 있지 않았나 합니다. 사실, 일본도 모든 역량을 다써버린 전쟁이었기에 정말 아슬아슬했죠.
지나가던이 2009/01/02 23:53 R X
그리고, 돌격 앞으로만 하는 건 당시 보병전술을 볼 때 일본만 그런 건 아닙니다. 기관총이란 물건의 진정한 무서움을 모르고 있을 때였거든요. 실제로 러일전쟁의 참상을 보고도 그건 2류열강의 전술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본 서유럽 강대국들은 1차대전 때 그야말로 피를 뒤집어쓰게 되죠. 그래도 구미열강은 이후 전술을 수정했지만, 일본은 정신주의로 나가다가 2차대전의 참상을 겪는거죠.
애독자 2009/01/03 13:55 R X
맞습니다. 당시의 보병전술이 일정한 집단을 이루고 전진하면서 소총사격을 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기관총 앞에서는 맥을 쓸 수 없었던 것이죠. 실제 여순전투당시 러시아군의 기관총은 단 2정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그걸 어쩌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지휘관이 무능했다는 증명이 아닐까요...
애독자 2009/01/03 14:01 R X
군대 갔다오신분은 모두 배웠겠지만 소총사격시 4가지 자세가 있죠. 그중에 엎드려쏴 자세는 사실 기관총때문에 생겨난 자세라지요... 이전에는 서서쏴 밖에 없었기때문에 기관총앞에서 추풍낙엽 신세였지요. 또 한가지는 이 당시 러시아군에서 철조망도 사용했었다는 것일 것입니다. 후에 1차대전당시 기본전술로 사용된 것중의 하나이지만요... 철조망으로 보병의 돌격을 저지하고 기관총으로 싹쓸이... 이 전술에 대항하기 위해 참호라는 방식이 생겨났지만... 모두가 방어개념이라 전쟁자체가 엄청난 소모전으로 흘러가게 되는거구요... 그런 상황을 타개하기위한 신무기로 영국에서 전차(지금의 장갑차)를 개발하게 되는것이죠.
나그네 2009/01/03 14:13 R X
이길수 없는 전쟁을 이겨버린 일본...바로 일본 패망의 시발점이 된 전쟁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