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체결 - 러일 전쟁종전


당시의 풍자화, 미국의 테오도오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러시아와 일본이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있습니다.


1905년 오늘,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2년간의 러일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19세기말 국제사회의 분위기는 깡패들의 세계처럼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은 세계 곳곳에서 비극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고, 조선이 위치한 극동지역도 예외는 아니었죠.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부동항을 얻고자 극동지역에서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메이지 유신 이래 급속하게 근대국가로 탈바꿈한 일본도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습니다. 러시아가 만주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동안 일본은 조선을 발판으로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1894년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혁명을 기화로 청나라와 전쟁을 벌인 일본은 가볍게 중국의 육군과 해군을 격멸시키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만주와 일본에 대한 권리를 양도 받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극동지역을 독식하는 모습을 보이자, 위기감을 느낀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3국은 즉각 일본에게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합니다. 세 강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힘이 없었던 일본은 이 '3국간섭'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청일전쟁의 대가로 얻은 만주에서의 이권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러시아에게 빼앗기게 되자 복수심에 불타는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전쟁준비에 착수합니다. 이 시기 일본의 국방예산은 10년전에 비해 3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1904년 2월 8일, 마침내 일본해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뤼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러일전쟁이 시작됩니다. 같은 날 조선의 제물포항을 빠져 나오던 러시아 극동함대 순양함 '바략'과 '코리츠'가 일본 해군의 공격으로 침몰합니다.

뤼순항에 포격을 가하는 일본 해군 수병들.


개전 당시 러시아의 육군은 세계최대 규모로 정규군과 민병을 합쳐 450여 만 명을 헤아리고 있었고, 해군 함대 규모도 일본에 비해 우세했습니다. 전쟁을 시작한 일본 육군의 규모는 16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육군은 그들의 방대한 영토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고 만주지역에 배치된 병력은 22만 명 정도 였습니다. 일본에 비해 양적으로 우세한 해군도 극동함대, 발틱함대, 흑해함대, 카스피해 함대 등 4개 함대로 분산되어 있었죠.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해 병력과 물자를 극동으로 보내려면 모스크바에서 뤼순까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열차도 부족해 한 달에 4만 명을 수송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일본군은 러시아의 증원군이 극동에 도달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승리를 얻으려는 계획이었습니다.


1904년 3월 한반도에 상륙했던 일본 육군 제 1군이 압록강을 건너 러시아군을 공격했습니다. 5월에는 제 2군이 요동반도에 상륙해서 다롄을 점령했으며, 이듬 해인 1905년 1월, 5개월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뤼순 요새와 뤼순 항의 러시아군이 일본 육군 제 3군에 항복했습니다.

뤼순 요새를 공격하는 일본 육군.

지상전에서 승리를 얻은 일본이었지만,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는데, 그 것을 제공한 것은 러시아 해군이었습니다. 개전 초기에 주도권을 상실한 러시아 극동함대는 뤼순항이 함락될 때까지 항구에 발이 묶여 있었고, 다급해진 러시아 정부는 발틱함대의 극동 파견을 명령 합니다. 그러나 러시아 군부에 만연한 부패와 무능력 때문에 명령을 받은 발틱함대가 출발하기까지는 6개월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더군다나 발트해에서 극동으로 오기 위해서는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양, 태평양을 횡단하는 장장 5천 마일의 항해를 해야 했습니다.

러시아 함대에 포격하는 일본 함대.

1904년 10월 출발한 발트함대가 대한해협에 도달한 것은 그로부터 7개월 후인 1905년 5월 27일이었습니다. 기나 긴 항해로 환자들이 속출했고 피로에 지친 수병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죠.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일본 함대는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수병들의 훈련상태나 지휘관의 능력은 러시아보다 한 수 위였습니다. 이틀간의 전투 끝에 발틱함대가 보유한 45척의 함정 가운데 목적지인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1척의 경순양함과 2척의 구축함뿐이었습니다. 이 해전에서 발생한 인명 피해는 러시아 해군이 1만명이 넘었고, 일본측은 700여명 남짓이었습니다. 전멸을 면하기 위해 식탁보로 급히 만든 백기가 러시아 함정에 게양되었고, 이로써 쓰시마 해전은 종료되었습니다.


더 이상 싸울 의지도 기력도 잃어버린 러시아는 9월 5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일본과의 강화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로써 러시아 짜르 체제는 몰락의 길로 들어서고 일본은 한반도와 동아시아 침략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죠. 러일전쟁은 모든 전투가 제3국인 조선과 중국 땅에서 벌어졌지만, 무력한 대한제국과 청나라는 자기 땅을 전쟁터로 내 주었으면서도 아무런 발언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좌측의 담배를 문 사람이 잭 런던.

당시 종군기자로 전쟁을 지켜 보았던 잭 런던은 조선의 무력한 백성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인간사의 마지막 심판자이며 또한 국민성을 최후로 심판하는 관문이다. 이 시험에서 대한제국의 국민들은 실패했다. 외국 군대가 자기 나라를 통과하는 데도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도망쳤다. 그들은 문짝이며 창문이며 할 것 없이 주워갈 수 있는 것 모두를 등에 지고 산으로 들어갔다... 도시와 마을은 텅 비어 있었고, 논과 들은 버려져 있었다. 김을 매지도 않고 파종을 하지도 않았기에 녹색식물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러일 전쟁의 끝은 을사늑약이었고, 그 결과 대한제국은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자기 땅에서 남의 손에 의해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러일 전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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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과닻 2007/09/05 14:18 R X
역사란 이렇듯 온갖 사건들과 인과로 묶여져 있는 셈이군요. 러일전쟁의 결과가 을사늑약으로 이어지고….

잭런던이라면 <강철군화>의 작가를 말씀하시는가요? 그렇다면 이 역시 심상찮은 인연이네요.

capa1954 2007/09/05 15:17 X
예, 바로 그 잭 런던이 맞습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익저미너'지의 종군기자로
조선을 방문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