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2월 8일 밤, 일본 해군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연합함대가 여순(旅順:뤼순)항 안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를 향해 돌연 어뢰 공격을 감행했다. 선전포고 없는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이었다. 이것이 일본과 중국, 러시아의 운명을 갈라놓은 러일전쟁의 발발이었다. 이미 한국을 확실히 수중에 넣은 일본으로서는, 대륙 진출을 위해 만주를 차지하고 있던 러시아를 치고 나가야 한다. 그 러시아의 근거지인 여순이 공격목표였다. 이튿날 일본 연합함대가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으나, 러시아측 해안 포대의 반격을 받고 일단 큰 바다로 물러갔다. 그리고는 이번엔 일본군대가 여순 외곽 남산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
|
일본군 함대 |
양측 모두 피할 수 없는 한판, 일본군 보병 대부대는 여순반도에 상륙하여 여순과 북쪽으로 연결된 철도를 절단하여 외부 연결 통로를 폐쇄하고 여순항도 봉쇄했다. 러시아군 역시 대련과 여순 사이에 외곽 방어선을 구축하고 방어에 들어갔다. 처절한 공격은 몇 달째 이어졌다. 8월에는 양국 해군이 여순항 밖에서 접전을 벌였다. 8월 말 요양(遼陽)에서는 시산혈하의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의 사상자도 2만 명 이상이 나왔다. 일본군이 이기기는 이겼지만 패전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었다.
드디어 전장은 여순항으로 좁혀졌다. 여순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인 해발 203 미터의 후석산 산정으로 9월 중순부터 일본군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석 달이라는 긴 공방 후에 12월 5일 일본군이 고지를 점령한다. 그러나 이 또한 이긴 편도 진 편도 없는 막대한 인명피해의 결과였다. 하루동안 일본군만 8천 명의 사상자가 날 정도였다. 산꼭대기까지 시체로 사닥다리를 쌓아 올라갈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긴 전투 끝에 1905년 1월 2일에 일본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장군이 러시아군의 항복 사자를 받아들였다. 전쟁 발발 1년만이고 지금부터 꼭 100년 전에 끝난 전쟁이었다.
|
|
러일전쟁 당시의 일본군 지휘관들. 앞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도고 해군사령관, 다섯번째가 노기 사령관 |
세계 육전(陸戰) 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로도 기록된 여순전투, 전쟁이 끝난 뒤에 아들과 남편을 잃은 일본의 어머니와 아내들은 울부짖었다. 그들은 총사령관인 노기가 귀국하는 날, 항의하기 위해 부두로 몰려갔다. 하지만 노기의 손에도 그의 두 자식의 유골함이 들려 있었다. 자기의 아들 두 명도 여순전투에 참가했다가 숨진 것이다. 이를 보고 분노하던 어머니, 아내들은 오히려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와 같은 신하가 있었기에 일본이 강대국 러시아를 이기고 국운이 충천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일본군의 전투장면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은 무자비한 학살에 들어갔다. 러일전쟁에서 숨진 일본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다. 중국측 기록으로는 이 때에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해 6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전한다. 당시의 성경시보(盛京時報)는 "탄환이 비오듯 쏟아지는 가운데 숨진 사람만도 수 만 명을 넘어섰다. 피가 튀고 살아 흩어지는 가운데 곳곳의 집들도 박살이 났다. 부자형제도 부부도 친척도 친구도 길에서 절규하고 있었다. 그 비통함과 한, 그 무고한 피해에 눈을 갖다댈 수가 없었다"라고 묘사했다.
러일전쟁의 피해자인 중국으로서는 당연히 전쟁에 의한 무고한 피해가 뼈에 사무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난 4월 30일 러일전쟁이 벌어졌던 여순을 찾은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기자는, 러일전쟁 100주년이라고 하는 역사에 있어서의 새로운 빛을 조명하려는 기운이 현지에는 부족하며, 공산당 정권하의 혁명사관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넘어서는 그 어떤 특별한 의미를 러일전쟁에 부여하지 않으려 한다고 볼이 멘다. 후지노(藤野)라는 이름의 그 기자는 러일전쟁이 청조 말기의 정치개혁이나 혁명운동에 아주 큰 영향을 준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점, 일본의 승리에 자극을 받아 조국 변혁을 꿈 꾼 많은 중국인 청년들이 대거 일본 유학에 나섰다는 점, 그를 통해서 세계조류에 눈을 떠서 손문(孫文:쑨원)이 주도하는 혁명운동의 핵심추진세력이 됐다는 점 등을 들면서 지금 중국에서는 예전과 같은 '일본찬가'는 들리지 않고 침략의 상처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도한다.
|
|
일 러 강화회담 |
바로 이것이 일본인과, 일본의 피해자인 우리 한국인이나 중국인들과 다른 점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우리나라와 중국을 침략하면서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고 피해를 입혔지만, 일본인들의 생각은, '일본의 진출'에 의해 너희들이 몽매한 왕조치하에서 자각을 일으켜 근대의 역사 속으로 편입될 수 있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즉 일본의 덕에 근대화가 가능했는데, 왜 그런 것은 보지 않고 허구한 날 피해 당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느냐는 것이다. 요미우리 신문의 시각이 일본인 전체의 시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본 최대의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이 신문이 이런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은, 일본인들의 시각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해서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속 마음은, 일본이 억압받던 아시아 민중을 대신해서 백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섰고, 그것이 근대 아시아 각국 민중들의 자각으로 이어져 아시아의 근대화를 촉진하며 아시아에 희망을 주었다는 점을 왜 아시아인들이 생각지 않느냐는 것일게다. 그러기에 잊을만 하면 쏟아지는 그들 일본인들, 고위 정치가들의 발언을 잘 들여다보면 바로 그런 뜻이 읽혀진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아무리 항의를 해도, 일본인들은 요지부동이고 막무가내인 것이다.
"역사를 미래에서 보자!"
그들이 늘 주장하는 말의 본 뜻은, 과거 피해자의 입장에서 상처만을 보지말고 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일본의 근대화가 바로 아시아의 교과서였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가해자인 일본의 입장이자 시각이다. 그들에게는 피해자들의 아픔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노대통령이 일본 측에 대해 과거에 한 사과에 걸맞는 행동을 보여잘라고 주문했지만, 그 주문이 성사될 것으로 기대할 수가 없다. 사과는 커녕 피해자의 아픔을 전혀 아픔으로 인식하고있지 않는 바에야.
kbs 이동식 기자



Powered by X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