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화당의 유혈 혁명. 갑신정변
<개화만이 부국강병의 지름길.개화당의 형성>
개화사상은 북학파 실학을 계승하였습니다. 북학파는 조선조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북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지원,박제가등이 있습니다.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통역관 오경석,중인 출신 의원 유홍기등 이들은 통상수교론자들로서 역시나 북학파 실학을 계승하였고 후학들을 양성하였습니다. 박규수는 1866년 평안도 관찰사 재직 당시 제네럴 셔먼호가 통상요구를 하며 노략질을 일삼자 그 배와 선원들을 죽이고 불살라버린 일을 빼고는 주구장창 개화,통상수교를 주장해왔습니다.오경석은 청나라를 13차례나 다녀오면서 서양문물들을 접하였습니다.
이들의 후학들로는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유길준등 모두 개화당세력들입니다.
개화당 역시 조정의 신하들로서 여러가지 활동들을 시작했습니다. 1881년 조사시찰단으로 김옥균,홍영식이 발탁되어 일본을 돌아봤고 1882년에는 김옥균,박영효,서광범등이 임오군란 직후 제몰포조약에 따라
사신으로 파견되었다.(이때 박영효가 태극기를 최초로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그림15.박영효가 최초로 태극기를 구상하고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임오군란때 잠시 철폐되었던 통리기무아문을 다시 부활시켰는데 이때 홍영식은 군국,교섭통상부의 참의와 참판을 차례대로 역임하였으며,김옥균은 외무참의에 임명되었습니다. 또한 박영효는 한성부 판윤에 재직되었습니다. 1883년에는 보빙사로 홍영식,서광범,유길준등이 발탁되어 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이 중 일부는 1885년 유럽시찰도 하게됩니다.
이렇듯 개화당은 활발한 정치활동으로 어느덧 굳건한 정치세력으로 떠올랐으며 이들은 사신으로 자주 해외에 나가 신식문물들을 돌아보니 개화 하여 서양의 문물들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한다는 생각에 확신을 더욱 굳건히 하였습니다.
<궁지에 몰린 개화당>
당시 민씨 일가들이 내세운 개혁은 말 그대로 '동도서기'였습니다. 즉 국가체제,기본사상은 그대로 유지하되 서양의 무기,과학기술만을 수용하자는 것입니다. 청의 양무운동과도 비슷하다고 할수있겠습니다.
이러한 정책만 봐도 개화당이 추구한 입헌군주제,즉 체제와 제도도 모두 바꾸는 개혁정책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개화당은 일본의 명치유신처럼 국가전반에 걸친 개혁을 원했던 것입니다.
당시 권력을 독차지하여 청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들어주는(임오군란때문에 청의 군대주둔 허용,내정간섭허용)민씨일가와 조선의 자주독립을 꿈꾸던 개화당과의 마찰은 당연히 예고된것입니다.
이미 엄청나게 커버린 개화당세력들을 민씨일가들이 곱게보진 않았습니다.
그결과 대표적으로 1883년 한성부 판윤이었던 박영효가 경기도 광주 유수겸 수어사로 좌천되었습니다.
또한 김옥균이 개화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차관도입을 하려고 하였으나 그 마저도 실패하여 개화당의 입지는 급속히 약화되었습니다.
그러던중 1884년 청과 프랑스가 베트남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여 청은 조선에 주둔중인 3천여병력중 절반을 빼갔습니다.또한 일본공사로부터의 150여명의 병력지원을 약속받은 개화당은
결국 거사를 일으키게 됩니다.
<우정총국에서 시작된 3일천하>
1884년 12월 4일.
이 날은 오늘날의 우체국인 우정총국의 청사개관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조정중신이었던 민영익,민영목,민태호,조영하,한규직.이조연등이 즐거운 마음으로 연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이 연회가 자신들의 죽을자리란걸 모르고 말이죠.
연회가 시작될 즘 우정총국 구변의 민가에서 불길이 치솟고 곧 검은연기가 피워올랐습니다.
곧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민영익이 나가던중 괴한에게 칼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바로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민영익은 죽지않고 당시 조선에 주재하던 선교사 호레이스 알렌의 치료를 받아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김옥균과 박영호등은 바로 임금과 민비가 있는 창덕궁으로 달려가
사대당과 청군이 반란을 일으켰다며 거짓 보고를 하고
경비가 수월한 경우궁으로 어서 피신하기를 간청했습니다.
궁밖에서 이미 계획해 놓았듯이 포성이 들리자 고종과 민비는 일단 경우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경우궁은 창덕궁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았으므로 소규모 부대만으로 수비하는데 수월했습니다.
개화당은 일본지원병 150여명, 자신들이 동원한 80여명 총 약 230여명의 병사들로 하여금 경우궁을 수비케 하였습니다.
이러는 동안 개화당은 민영목,민태호,조영하,윤태준,한규직,이조연등 민씨일가를 비롯 그들에게 동조한 중신들을 창덕궁으로 입궐하라는 거짓 명령문을 내리고 모조리 참살하였습니다.
이렇게 피비린내가 진동하면서 1일이 흘러갔습니다.
다음날 개화당은 새로운 조정대신들의 명단을 구성하여 발표하였습니다.
영의정 이재원
좌의정 홍영식
예조판서 김윤식
병조판서 이재완
병조참판 서재필
형조판서 윤응렬
호조참판 김옥균
도승지 박영교
한성부판윤 김홍집
좌포도대장 박영효
우포도대장 서광범
민비는 국방,도성치안의 요직엔 개화당이 앉았으며 민씨일가들이 배제된 것을 보고 이 변이 자신들을 향한 것이라 눈치채고 서둘러 경우궁을 벗어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길려고 하였습니다.
암튼 눈치하나는 기가막혀요. 하지만 개화당은 그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민비는 경비병력의 다수를 차지한 일본공사에게 직접요청하였습니다.
예상밖으로 일본공사는 흔쾌히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그날 저녁 고종과 민비는 다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이에 다급해진 개화당들은 그날밤 서둘러 정강14개조를 작성하였습니다.
정강14개조 파일첨부
그 주요 내용들을 용약해 보자면 먼저 청에 대한 사대관계 폐지,양반의 신분제도 폐지
조세제도의개혁,국왕권력제한,근대적 경찰제도 실시, 재정·병권 일원화등 대부분 개혁정책이었습니다.
정변 마지막날.개화당은 어떻게 해서든지 정변을 성공시키기 위해 14개조 정강을 민가에 붙여 발표하였습니다.하지만 이미 청군은 민비의 요청에 따라 진압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조선주재 청장교들은 일본과의 직접마찰을 꺼려하였으나 위안스카이만이 강력하게 주장하여 이홍장에게 승인을 받고 곧 병력을 투입하게 됩니다. 또한 일본 공사는 본국으로 부터 청군과의 충돌은 피하라는 교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대로 병력들을 철수 시켰습니다.
청군이 우수한 무기와 월등한 군사력으로 밀어붙이자 창덕궁을 사수 하겠다던 개화당의 주요 인사들은 결국 궐을 빠져나갔습니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등은 궐을 빠져 나갔으며 홍영식은 끝까지 남아 고종을 수행하겠다고 하다가 청군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김옥균은 10년동안 망명생활을 하였는데 처음에는 일본으로 망명갔다가 다시 청으로 망명하였는데이때 민씨일가의 사주를 받은 홍종우의 손에 암살당했습니다.
<갑신정변 그 후....>
갑신정변은 근대국민국가건설과 입헌 군주제를 목표로 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이었습니다.
이 갑신정변은 훗날 갑오개혁-독립협회활동-애국계몽운동에 까지 그 사상이 미치게 되며
신분제를 타파하여 인민평등권을 확립하여 하였던 반봉건운동이었습니다.
하지만 개화당의 개혁은 외세에 너무 의존했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애초에 150여명뿐만 지원을 해주는 일본군으로 1500명이 넘는 청군을 상대하겠다고 생각한 발상자체가 이해할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개화당의 개혁준비는 매우 부족했다고 할것입니다.
또한 일본의 침략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명치유신의 결과만을 보고 의존했단 것도 간과할수없습니다.게다가 민심은 일본에게 돌아져 있는 상태에서 일본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것은 민심에 이반되는 행위였습니다.
갑신정변을 계기로 청의 내정간섭은 더욱 심해졌으며 또한 일본과는 한성조약을 체결하여
배상금은 물론 공사관 신축부담비용이라는 명목하에 또다시 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1885년에는 청과 일본이 텐진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에 주둔한 양국의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청은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조선에 역량을 집중시킬수 없었으며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위해 가장큰 걸림돌이던 청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텐진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 텐진조약은 훗날 청일전쟁의 계기가 되는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조약입니다.
또한 같은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는 명목을 구실삼아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여
해밀턴 항으로 이름을 붙이고 해군기지로 사용하였는데 이를 거문도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청과 일본,러시아와 영국등이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세력을 확장하려 하자
독일영사 부들러와 유길준은 조선의 중립화론을 건의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종로)우정총국(郵征總局)-갑신정변의 현장-
사적 제213호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39-7
우정총국은 당시 해외를 시찰하고 돌아온 홍영식(洪英植)의 건의로 근대식 우편사무를 취급하기 위해 고종 21년(1884) 4월22일 왕명으로 설치한 관청으로 1884년11월18일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우정업무가 시작되어 중앙에 우정총국을 두고 지방에 우정국을 두는 구조체계를 갖추었다. 우정총국 총판에는 병조참판 홍영식을 임명하고 박영효 등 15명이 사사가 되어 조선시대 국립병원인 전의감(조선시대 궁중에서 쓰이는 의약을 제조하고 약재를 관리하던 관아)을 개수하여 청사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12월 4일 우정총국 건물이 완공되어 축하연회를 여는 것을 기회로 삼아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파들이 집권 사대당을 제거하고 신정부를 조직하는 강신정변을 일으킨 장소로 더 유명하다. 그런데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남에 따라 이 관청은 문을 닫고 우전총국에서 찍은 5종의 우표는 사용되지 못하였다.
우체국 건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이며,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한 건물우정총국 건물은 일제 때 일본인이 거주하고, 광복 후에도 개인주택으로 사용하면서 여러 건물이 모두 헐리고 1채만 남아 있었는데 정보통신부에서 이 건물을 구입한 후 체신기념관으로 꾸미고 우편관계 자료를 전시하여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고 전주우편국 집배인 이시중(李時中) 순직비>
우정총국 입구 안내판 뒤 한 구석에는 자연석으로 된 순직비 하나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전주우편국 집배인 이시중(李時中)의 순직을 기념하는 비로, 이시중은 1927년 7월22일 현재 전주시 완산구 평화동2가로 우편배달을 나갔다가 마침 홍수로 냇물이 불어 냇가 건너의 마을에 편지를 배달할 수 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편지를 돌멩이에 매달아 냇가 너머로 던졌는데 돌멩이만 냇물을 넘어 가고 엽서는 물속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이시중은 그 엽서를 건지려고 탁류에 뛰어 들었다가 그만 익사를 하고 만 것이다.
이 순직비는 이시중의 시체가 걸렸던 바로 그 바위를 옮겨다가 글을 써서 기념비로 만들어 세운 것으로 해방 후에는 전주우체국 뒤뜰로 옮겼고, 1973년 우정박물관으로 이전해 온 것으로 오늘날 우체국 직원들의 사표가 되고 있다.
[갑신정변 14개조 개혁 정강]
1.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하게 하고 청국에 대한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
┖ 임오군란 때 청으로 납치·압송되었던 흥선대원군을 돌아오게 하고 사대 관계를 폐지하고자 하였다.
2.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권을 제정하고 재능에 의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
┖ 양반 신분 제도, 문벌 제도를 폐지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악한 관리를 근절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며 국가 재정을 충실하게 할 것
┖ 조세 제도 개혁을 통해 관리들의 중간 수탈을 막고 백성의 부담을 줄이며 재정을 늘리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4.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 중에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5. 그 동안의 국가에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 가운데 특히 심한 자는 처벌할 것
┖ 전근대적인 내시 제도를 폐지하고 탐관 오리를 처벌하여 능력있는 자들의 관직 진출을 도모하려 하였다.
6. 각 도의 환곡을 영구히 면제할 것
┖ 빈민 구휼 제도로 시작된 환곡이 고리대화되자 이 제도를 폐지하고자 하였다.
7. 규장각을 폐지할 것
┖ 인재 등용을 위해 정조가 설치했지만 세도 정치기 오히려 외척 세도 정치의 기반으로 변질되었기에 폐지를 주장하였다.
8. 조속시 순사를 두어 도적을 방지할 것
┖ 근대적 경찰 제도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9. 혜상공국을 폐지할 것
┖ 1883년 만들어져 보부상의 특권을 보호하던 혜상공국을 없애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근대적 상업 특권을 폐지하려 하였다.
10. 그 동안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할 것
┖ 형사 정책 개선을 통해 민심을 무마하고자 하였다.
11. 4영을 합쳐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조속히 설치하고 육군 대장은 왕세자로 정할 것
┖ 군사 제도를 개혁하여 병권을 일원화라고 하였다.
12. 일체의 국가 재정은 호조로 하여금 관할하게 하고 그 밖의 재무 관청은 폐지할 것
┖ 재정의 일원화를 말하는 것으로 각 관청에서 담당한 조세 행정을 호조로 통일시켜 과도한 조세 징수, 중간 착복, 낭비 등을 막으려 하였다.
13. 대신과 참잔은 날짜를 정하여 합문 내의 의정부에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 공포할 것
14. 의정부, 6조 외에 일체 불필요한 관청을 혁파하되 대신 참잔으로 하여금 이를 국왕에게 보고하도록 할 것
┖ 국왕의 전제권을 축소하고 내각 제도를 수립하여 불필요한 관청을 없애려 하였다.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려는 급진 개화파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한반도 중립화론]
- 갑신정변 이후 청의 내정 간섭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1884년 러시아가 함경도 경흥에 조차를 설정하고 베베르를 통해 러시아가 친러 내각을 형성해 나갔다. 1885년에는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했다.
- 이 상황에서.... 독일 영사 부들러와 급진 개화파 유길준은 한반도 중립화론을 제시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은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에 처음 문을 열었다.
처음 문을 연날을 기념하기 위해 높은 관리들과 조선에 와 있던 각국 외교관들이 파티에 참석했다.
파티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인 10시에 불이 났다. 개화파의 갑신정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정국에서 민영익과 수구파들을 처단한 김옥균.
고종이 머문 창덕궁으로 달려간 개화파는 수문장마저 같은 편이었던 까닭에 쉽사리 왕과 왕비를 만날 수 있었다.
김옥균이 미리 준비해 둔 대로 "청나라 군사가 난을 일으켜 불빛이 성 안에 가득하고 대신들을 마구 죽이고 있으니 급히 자리를 옮겨 피신하소서."라고 거짓말로 꾸며댔다.
고종과 왕비는 의심이 갔지만,폭탄터지는 소리에 당황한 고종과 왕실사람들은 개화파를 따라나섰다.
고종 일행을 데리고 다시 금호문을 나선 개화파는 일본 군대가 지키고 있는 경우궁(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친어머니인 수빈 박씨의 위패를 모신사당이며 지금 현대 빌딩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개화파는 자신들이 하는 일에 방해가 되었던 높은 관리들을 불러들여 왕이 내린 명령이라고 생각하고
급히 달려온 관리들은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모두 개화파가 내려친 칼에 쓰러졌다.
일이 이렇게 되자 개화파는 정변이 성공했다고 믿었다.
다음날(2일째),
개화파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한다고 발표했다.
영의정에 흥선대원군의 조카 이재원, 좌의정에 홍영식, 외교에 서광범, 군사에 박영효와 서재필, 호조참판에 김옥균.
이제 천하는 완전히 개화파의 손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었다. 김옥균은 부푼 마음으로 고종에게 개혁안을 내보였다
3일째 되는날,
개화파는 다른나라 공사관에도 사람을 보내 새 정부가 세워졌음을 알렸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14개 항목을 정리해서 12월 6일 오전 9시무렵, 왕이 내리는 교지(敎旨) 형식을 빌어 이 내용을 발표했다
고종은 창덕궁으로 돌아와 개화파의 개혁안을 그대로시행하겠노라고 발표했다.
김옥균은 조선 천하가 이제 개화파의 뜻대로되어갈 것이며, 조선은 새로운 나라로 탈바꿈할거라고 믿었을때,
오후가 되자 원세개가 이끄는 청나라 군인 1,500명이 창덕궁으로들이닥쳤다.
전날 왕비가 몰래 사람을 보내 청나라에 부탁을 했던 것이다.
일본군만 믿었던 개화파들은 당황해서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도 김옥균은 고종을 모시고 도망가려고 했지만
일본 공사 다케조에가 위험하다고 말렸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서재필등은 인천으로 가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개화파중 미처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은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도 처행당했다.
갑신정변은 이렇게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새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개화파는 역적이 되었다.
홍영식은 궁궐에 쳐들어온 청나라 군대의 칼을 맞고 죽었다.
일본군대와 같이 도망을 친 개화파들은 일본에서도 환영받지도 못했다. 공사다케조에는 일본에 가자 태도를 돌변하여 이들을 차갑게 대했다.
그래서 서재필은 많은 고생을 하다가 결국 미국으로 건너갔고 정변을 제일 앞장섰던 김옥균은 일본에서 지내다가 10년 후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 유학생 출신인 홍종우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헌법을 만들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보고자 했던 그의 꿈은 역적이라는 이름으로 평가되었다.
♣ 갑신정변이 실패한 까닭♣
1.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2. 개화파는 일본을 지나치게 믿고 의지했다. -개화파의 갑신정변은 근대 국가를 건설하려 한 최초의 개혁 운동이었다.
◐ 갑신정변에 참여한 궁녀 '고대수' ◐
고대수(顧大嫂)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궁녀(宮女)이다. 7척이나 되는 키에 못생긴 얼굴 때문에 임금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던,
궁녀중에서도 가장 아래 등급인 무수리 이우석(본명)은 자신에게 친절했던 개화파를 위해 일했다.
창덕궁 침전 위에서 폭약을 터뜨린 것도 바로 그녀이다.
김옥균이 쓴 [갑신일록]에는 그의 애기가 딱 한 번 나온단다.
"궁녀 모씨(나이 42세. 신체가 남자처럼 건장하고 힘이 남자 대여섯을 당해낼 만하여 고대수라고 불리며 왕비의 총애를 받아 가까이 모시는데 10년 전부터 개화파에 들어와 때때로 비밀을 통보해온 자다)가 화약을 대통에 넣어 갖고 있다가 바깥에 불이 난 것을 신호 삼아 통명전에서 불을 붙이기로 한다."
♣ 갑신정변 개혁안 ♣
● 청나라에 끌려간 흥선 대원군을다시 모셔 오고 청나라에 바치는 조공을 폐지하여 청나라와 관계를 끊을 것.
● 양반 상놈 신분을 없애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 토지에서 걷는 세금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 부패를 뿌리 뽑고, 가난한 백성을 구하며 나라 경제를 충실하게 할 것.
● 환곡을 영원히 없앨 것.
● 나라에 엄중한 손해를 끼친 자는 엄벌할 것.
● 필요없는 관청을 없앨 것.
● 나라 경제는 호조에서 맡아 할 것.
● 유능한 청소년들을 뽑아 외국에 유학생으로 보낼 것.
● 과거 제도를 없앨 것.
♣ 홍종우♣
홍종우는 상해까지 찾아가 김옥균을 죽인 인물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프랑스에 유학을 가서 우리 문학을 소개했고
(신경숙소설 '리진'에서 리진을 사랑한 인물로 잠깐 나온걸로 안다)
우리 민족 스스로 외국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홍종우는 근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황제의 힘이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점이 김옥균,그리고 독립협회와는 다른점이다.그래서 황제를 위험에 빠뜨리고 외국 군대르 불러들였다는 이유로 정부를 대신해서 김옥균을 죽인 것이다.
1. 1880년대 이후 개화파의 분위기
오늘 다룰 내용은 갑신정변입니다. 갑신정변은 1884년에 일어난 사건이지요. 갑신정변은 개화기의 모든 정황과 동 떨어져 단독 사건으로는 볼 수 없는 사건입니다. 개화기의 큰 흐름 속에서 척사와 개화라는 양대 기류가 정면 충돌한 사건이지요.
따라서 갑신정변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전 포스트에서 다룬 조선책략, 위정척사, 임오군란, 개화파의 흐름 등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럼 간략하게 그 흐름만 다시 짚어볼까요?
1880년 개화의 지침서인 조선책략이 들어온 이후, 조선 사회는 개항과 개화를 반대하는 위정척사운동이 본격화되었습니다.이 운동은 조선책략 태우기 운동, 개화를 추구하는 민씨 정권 타도 운동으로 까지 발전하려는 분위기였죠.
반대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속에서 숨 죽여 개화를 주장하는 개화 1세대들은 민씨정권의 등장이후 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이들은 1878년 충의계라는 개화조직을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개화를 위한 깃발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이 개화와 척사라는 큰 흐름은 언젠가 한번 크게 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폭발은 엉뚱하게도 <임오군란>을 통하여 전혀 다른 역사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임오군란은 청의 도움을 받은 민씨세력의 재집권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청나라의 전면적 내정간섭이 시작되었지요. 문제는 개화와 척사라는 큰 흐름이 <청>이라는 외세에 의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청나라는 조선에 정치고문인 묄뢴도르프, 군사고문인 마젠창을 보내면서 민씨정권의 소극적인 개화마저도 태클을 걸게 됩니다.
안 그래도 민씨정권의 개화에 맘이 안 들었던 급진개화파들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적 개화파들은 그동안 민씨정권에서 추진해온 소극적 개화파들의 정책으로는 근대화가 늦어질 것으로 판단하고 <고종>에게 직접 접근하여 빠른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 :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홍영식(좌측부터)>
2. 급진개화파가 청의 세력에게 밀리다.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고, 기존의 개화파들의 입지가 좁아지자 급진 개화파들이 고종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청의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883-1884년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급진개화파들은 조정에서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청의 세력을 견재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철종의 딸인 영혜공주와 결혼한 <박영효>는 고종과의 인척관계를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청을 견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분위기에서 김옥균은 고종에게 개화가 필요한 이유를 역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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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렇다면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이는 오직 밖으로 널리 구미 각국과 신의로 친교하며, 안으로는 정략을 개혁하여 우매한 백성들을 문명의 도로 교육하며, 상업을 번성시켜 재정을 정리하는 데 있습니다. 또 군대를 기르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할 수 만 있다면 영국은 마침내 거문도에서 물러날 것입니다. 그 밖의 여러 나라도 역시 침략의 뜻을 버릴 것입니다. 바야흐로 세계는 상업을 주로 하여 서로 산업의 크고 많음을 자랑하고 경쟁하는 때이거늘, 아직도 양반을 제거하여 뿌리를 뽑지 않는다면 국가의 패망은 기어코 앉아서 기다리는 꼴이 될 뿐입니다. 전하께서 이를 철저히 반성하시어 하루 빨리 무식 무농하고 수구 완고한 간신배를 축출하시고, 문벌을 폐하고 인재를 골라 중앙 집권의 기초를 확립하여 백성들의 신용을 얻으시고, 널리 학교를 세워 백성의 지식을 깨우치게 하시옵소서. 외국 종교를 들여와 교화를 돕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 고균 김옥균전 - |
고종은 급진개화파의 사상을 어느 정도 공감하였습니다. 이미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파의 추진 정책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당시 조정의 실권은 청의 고문들에게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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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급진개화파와 청의 세력간의 갈등은 <재정문제>를 둘러싸고 크게 한판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재정은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는데, 이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의 고문은 묄렌도르프는 <악화주조>를 주장합니다. 악화주조란, 일단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돈을 찍어내자는 것으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짓기 위해 <당백전>을 발행한 것처럼 <당오전>을 발행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청의 재정고문의 의견에 급진개화파는 적극 반대합니다. 흥선대원군의 당백전 발행으로 물가가 올라서 백성들의 삶이 황폐해졌다는 것을 이유로, 돈을 만들어 찍기 보다는 <차관을 빌려서 재정 위기를 해결한다는 경제원칙>을 주장한 것이지요. 즉, 급진개화파의 재정해결책은 <차관도입론>이었습니다.
박영효는 일본에서 돈을 빌려서 국가의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고, 급진개화파의 입지를 확실히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겪은 후 내부적으로 일시 불황을 겪고 있던 일본은 돈을 빌려주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급진개화파의 입지는 한없이 좁아졌고, 청의 고문들은 급진개화파를 공격하여 그 세력을 뿌리뽑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습니다.
3. 하늘이 도와 청군이 일시 물러가다.
차관 도입에 실패한 개화파들은 정치적으로 구석에 몰려 곧 괴멸당하거나, 망명해야 할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하늘이 도왔습니다. 청과 프랑스 사이에 청불 전쟁이 벌어졌고, 청나라는 조선의 군대를 급히 인도차이나 반도로 돌려야 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3000명의 청군이 있었는데 이중 절반 이상이 조선을 떠난 것입니다.
김옥균 등 개화파들은 일본에 군사적인 지원을 약속받고 정변을 계획합니다. 일본 역시 청 때문에 약해진 자신들의 입지를 고려해서 급진개화파를 적극 지원하기로 합니다. 급진개화파들은 친청파인 보수세력을 제거할 시기로 <우정국 축하연>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그럼 갑신정변의 과정을 상세한 사료로 한번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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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1884) 9월 다케조에 신이치가 부임지인 조선에 왔다. 이때 중국와 프랑스는 안넘전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일본 공사는 김옥균 등을 꾀어 말하기를 <청국은 이제 조선을 돌아볼 틈이 없으니 청국세력을 배제하고 독립할 기회는 바로 이때다. 기회를 놓치지 말라> 하니 매일 밤 모여서 은밀한 화합을 가지고 일본군을 의탁하여 청국인을 방어하며 자객을 양성하여 청당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또한 일본 정부로부터 군함을 파송하여 후원해준다는 밀약까지 받았다. - 박은식, 한국통사 - 같은 해 10월 17일 우정국이 낙성되고 홍영식이 총판이 되매, 연회를 베풀고 대관들과 각국 공사, 영사들을 초청하였다. 이에 육조판서와 내아문, 외아문 독판, 전후좌우 네 영사, 그리고 미국 공사 푸트, 영국 영사 애스톤, 청국 영사 진수당 등이 모두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일본 공사는 병을 칭탁하고 오지 않았으며 서기 시마무라를 시켜서 대행하도록 하였다. 같은 날 오후 6시에 연회를 시작하였는데, 홍영식 등은 미리 왕궁문 앞과 경우궁 안에 사관생도들을 매복시켰으며, 또한 우정국 앞 개천에 자객을 매복시켜 방화로 신호를 하게 하였다. 김옥균 등은 출입이 잦았으나 지휘하는 형적은 속이고 극비에 부쳤다. 10시가 되어 갑자기 담장 밖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그 때 달이 밝아 대낮 같은데 불빛이 충천하였다. 민영익은 <불이야> 소리를 외치며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밖으로 나오니 앞 개천을 따라오던 자객이 칼로 내려치자 영익이 몇 군데 자상을 입고 쓰러지자, 빈객들은 모두 대경실색하였다. 일당들은 여기서 청당을 모두 죽이려 하였으나 단지 민영익 한 사람만을 부상시켰다. 박영효, 김옥균, 사광범 등은 대궐로 달려가 바로 침전에 들어갔으니, 미리 내응이 되어 있던 궁녀가 문을 열고 기다린 까닭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헐떡이며 급히 아뢰되 <청나라 군사가 난을 일으켜 불빛이 성안에 가득하고 대신들을 마구 죽이니 급히 자리를 옮기시어 피신하소서> 라고 청하고, 아울러 일본 공사를 불러들여 호위케 하라고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김옥균 등은 울며불며 달래다가 위협하며 빨리 떠나라고 요구하였다. 중관 유재현이 살해되니, 왕은 창황히 침전에서 나갔으며, 조태호, 홍태후와 왕후, 태자 이하는 모두 걸어서 따라나섰다. 영숙문에 이르러 갑자기 총소리가 일어나자, 김옥균 등은 급히 외치며 청병들이 많이 이르렀으니 서둘러야 한다고 하였다. 이 총소리는 일당들이 미리 이곳에 사관생도들을 매복시켜 왕이 이르는 것을 엿보아 총소리를 내 암호로 삼은 것이었다. 다시 일본 공사를 불러들여 호위해달라고 청했으나 왕이 듣지 않자, 김옥균, 서광범 등은 품과 있던 연필과 서양 종이를 꺼내어 일사내위(일본공사는 나를 지켜라)라는 넉자를 쓰고, 인신 증거도 없이 일본 공관에 보냈다. 왕이 경우궁에 당도하였다는 소식이 일본 공관에 이르자, 일본 군사들은 이미 낭우에 가득하고 일본 역관 아사야마는 맞아 뵙고, 공사 다케조에는 따라 들어왔다. 왕은 동상에 어거하시고, 일본 공사와 일당들은 청사에 거처했다. 조금 뒤 사관생도 12명이 입궁하여 둘러쌌으며 김옥균, 홍영식 등은 슬퍼하며 우는 모양을 짓고 있었다. 이에 일본병은 궁문을 에워싸고 일당들은 그 가운데 거하면서 외부와 내통을 억제했다. - 박은식, 한국통사 - 이 때 우리 민인들은 일본인을 원수로 보았고 맹세코 함께 살 수 없다 하여 만나면 치고받아 죽이기까지 했다. 청병 또한 일본 공사관을 밤에 몰래 공격하여 39명을 죽이고 부녀는 욕을 보였으며 방사를 파괴하니, 드디어 다케조에 공사는 깃발을 내리고 군대를 이끌고 서소문을 빠져 도망쳤다. 이 때문에 우리 백성들은 더욱 노하여 일본 공관을 불태우고 육군 대위 이소하야시를 죽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머리를 깎고 양복 차림으로 영사관에서 나무 궤짝 속에 몸을 감추고 24일 일본 상선을 타고 도망쳤다. - 박은식, 한국통사 - |
4. 갑신정변과 김옥균에 대한 평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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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여러 적들(김옥균 등)은 서양을 존중하고 요순과 공맹을 비판하면서 유교를 야만이라고 하고, 도를 바꾸려 하면서 매번 개화라 일컬었다. - 속음청사, 상 - 김옥균은 청군의 종주권 아래에 놓여 있는 굴욕감을 이겨내지 못하여 어떻게 하면 이 같은 치욕에서 벗어나 조선이 세계 각국 가운데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일원이 될 것인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심초사 하였다. 김옥균은 그대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니, 시대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도 강력한 현대 국가가 되어야 함을 절실하게 바랬다. 그리하여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기술 채용에 따라 정부와 일반 사회의 구투인습을 일변시킬 필요를 확신하였다. 그(김옥균)는 구미 문명이 하루저녁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열국이 서로 경쟁을 벌여 점진적으로 이룩해낸 것으로서 수세기나 필요했으나, 일본은 일대만에 속성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일본을 본보기 삼고자 백방 분주하였다. - 서재필, 회고 갑신정변 - 한국이 생존하기에 적합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해 한국이 적자로서 살아남게 하는 것이다. 한국이 공정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한국이 적자로서 생존할 능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 윤치호일기, 1982년 4월 7일 - 1884년 중엽에 새로운 집단이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일본으로 유학 간 몇몇 젊은이들은 철저한 개혁론자가 되어 돌아왔다. 일본이 변모하는 과정을 본 이들은 일본처럼, 아니 일본보다 더 철저히 개혁을 바랐다. 가능하다면 필봉 한자루로 조국을 서구화하고 싶어하였다. 또 일본 관료의 품에 몸을 던져 혁명적 변혁을 위한 만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 F. A. 맥켄지, 대한제국의 비극 - 처음 김옥균은<EMBED id=bootstrapperhistoriatistorycom22123516 src="http://historia.tistory.com/plugin/CallBack_bootstrapperSrc?nil_profile=tistory&nil_type=copied_post width=1 height=1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invokeURLs="false" autostart="false" allowScriptAccess="never" allowNetworking="internal" enableHtmlAccess="false" AllowHtmlPopupwindow="false" wmode="transparent" EnableContextMenu="false" FlashVars="&callbackId=historiatistorycom22123516&host=http://historia.tistory.com&embedCodeSrc="http%3A%2F%2Fhistoria.tistory.com%2Fplugin%2FCallBack_bootstrapper%3F%26src%3Dhttp%3A%2F%2Fcfs.tistory.com%2Fblog%2Fplugins%2FCallBack%2Fcallback%26id%3D2212%26callbackId%3Dhistoriatistorycom22123516%26destDocId%3Dcallbacknesthistoriatistorycom22123516%26host%3Dhttp%3A%2F%2Fhistoria.tistory.com%26float%3Dleft" swLiveConnect="true"> 박규수 선생 문하에서 배웠다. 1881년 나는 영선사로, 김옥균은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다같이 나라를 일으킬 것을 기약하였다. 임오군란 이후부터 청이 우리나라에 내정간섭을 자주했다. 나는 청나라당으로 지목되었고, 청국이 우리의 자주권을 침해하는 데 분노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은 일본당으로 지목되었다. 그 후 일이 허사로 돌아가자 세상을 그를 역적이라 하였는데, 나는 정부에 몸을 담고 있어 그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결코 다른 나라에 있지 않았고, 애국하는 데 있었다. - 김윤식, 속음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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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에 대하여, 김옥균에 대하여 당시의 전통 성리학자들은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온건개화파를 비롯하여 개화사상을 알고 있는 이들은 김옥균에 대하여 동정을 보낸 것 같습니다. 독립협회의 서재필은 그를 민족의 근대화를 위하여 노심초사한 인물로, 윤치호는 당시 근대화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같은 개화파이지만 노선을 달리한 김윤식은 김옥균 역시 애국자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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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김옥균이 걸어온 길이 우리 개화사상의 전통적 맥을 잇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다룬 개화파의 연결그림이 아래 있죠? 김윤식이 말한 김옥균의 스승이 박규수라는 점, 김옥균 역시 개화파의 계보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개화파의 흐름도>
5. 정권을 잡은 급진개화파, 바로 개혁 정강을 내 놓다!
갑신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김옥균은 바로 개혁 정강을 내놓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이죠. 내용을 한번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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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
이 14개조 정강의 핵심 내용을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나눠보죠.
일단 정치적으로 급진개화파가 추구한 것은 <입헌군주제>입니다. 김옥균은 조선 사회가 추구해야 할 근대화는 서양식 <부르조아>계급이 사회를 주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조선에서 부르조아 계급은 곧 토지를 가진 지주계급과 대외무역에 종사하는 상공업 계급이었죠. 따라서 이들을 중심으로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일본 메이지 헌법처럼 법으로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동양식 전제군주제를 영국, 미국식 의회제도로 바꾸어 <내각이 책임지고 통치한다>는 방식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국의 젠트리 계급이 명예혁명을 일으켜 내각을 수립한 것을 모델로 하며, 그것을 받아들인 일본의 메이지 유신 헌법을 모방하려 한 것입니다. 따라서 궁안의 내시부를 혁파하고, 의회식 회의제도인 고관 회의를 적극 도입할 것을 주장합니다.
다음으로 외교분야에서는 그동안 내정간섭을 해온 청을 적극 배제하고, 자주 독립국임을 주장합니다. <흥선대원군을 돌아오게 하라>라는 것은 대원군의 집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어른을 납치는 청을 질타하고, 사대외교를 폐지하여 나라의 자주권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다음 경제분야에서는 부세제도의 개혁인 <지조법>을 실시합니다. 이것은 지주의 봉건적이고 불법적인 수탈을 방지함으로서 <근대적 세율의 법정화>를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또 불명확한 토지의 소유권을 확실하게 하여, 주인이 없는 땅은 국유지로 편압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즉, 일정한 국유지를 확보하면서도, 토지소유자인 지주의 소유권을 인정하여 <지주계급의 부르조아지화>와 <국가 재정 확보>를 동시에 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지요. 이렇게 확보한 재정은 호조가 일괄적으로 관리하고 예산을 계획함으로서 국가 재정을 근대화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메이지 유신을 모방한 것이지만, 큰 약점이 있습니다.
지조법은 실제 지주층에게 유리한 반면, 백성들이 원한 <토지제도 자체의 개혁>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이 지조법을 통한 근대적 부르조아지 양성은 농민층의 지지를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회분야에서는 봉건적 관습인 신분제도, 과거제도 폐지를 주장합니다. 이것은 유럽의 시민 혁명과 메이지 유신에서 모방한 것으로, 전근대적 제도를 타파해야 근대적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인식한 결과입니다.
즉, 양반중심의 지배체제를 청산하고, 지주층의 기득권을 중심으로 한 <서구적 자본주의>가 바로 갑신정변에서 추구한 이상적 근대화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위해서는 청나라라는 외세의 간섭을 완전 배제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6. 갑신정변의 실패
우정국 정변을 계기로 정권을 잡은 김옥균 일파는 3일만에 청군의 개입으로 망명을 떠납니다. 청의 대응은 김옥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척 빠른 것이었습니다. 청은 개화당의 정권 획득이 조선에서 기득권을 잃게 되는 것임을 인식하고 발빠른 대응을 한 것입니다. 문제는, 개화파를 돕기로한 일본 공사가 김옥균을 돕지 않은 것입니다. 청군이 예상과는 달리 빠르게 대군을 조선에 보낸 마당에 일본 공사관군이 대응하기가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갑신정변은 3일만에 실패로 끝납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일본이 돕지 않은 것 외에 급진개화파의 미숙성도 있습니다. 김옥균은 단순히 근대적 개혁을 국민들이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큰 착각이었죠. 일단 개혁의 방향이 국민중심이 아니라 <지주적 부르조아> 중심이었습니다. 급진개화파들은 백성들을 우매하여 계몽시켜야할 대상이라는 <계몽관>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주제를 인정하고 지주층을 중심으로 부르조아적 지조법을 단행함으로서 봉건적인 부분을 개선하지 못한 개혁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일본과 밀착한 개혁이었던 만큼 백성들은 개혁 자체의 의도를 불순하게 보고 있었지요. 갑신정변은 최초의 근대국민국가 건설을 지향한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개혁이 되고 말았습니다.
7. 청과 일본은 정변을 핑계로 경쟁적으로 조선에 침투하다.
갑신정변이 청의 간섭으로 실패함으로서 조선은 다시 <청의 고문>이 실권을 잡아 정치하는 임오군란 이후로 되돌아갔습니다. 청의 간섭이 심화될수록 보수세력은 계속 장기집권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게 되었고, 개화세력은 이제 완전 도태되고 맙니다. 이후 김홍집, 박영효 등이 깁오개혁, 독립협회 등의 세력과 연계되어 활동하지만 그 활동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갑오개혁의 결과, 조선은 일본공사관이 훼손되었다는 이유로 일본 공사관의 신축비를 부담하고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하게 됩니다.(한성조약)
또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공동출병, 공동철수 할 것을 약속하는 톈진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것은 조선에서 정치적으로 밀린 일본이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맺은 것으로, 일본이 청과 동등한 파병권을 확보함으로서 조선에 대한 군사적 기반을 계속 유지해나감을 의미합니다.
김옥균 "오늘밤, 민영익을 못죽이면 내가 죽는다"
1. 우정총국 파티장- 갑신정변 첫날
1884년 12월 4일. 음력 시월 열이레의 둥근 달이 서울 전동(典洞)의 우정총국을 비추고 있다. 이 밤, 느닷없이 치솟는 불길이 역사의 한 순간을 그을린다. 갑신정변의 시작이었다. 우정총국은 이날 밤 초대 총판(總辦·대표) 홍영식이 주최하는 낙성식 축하파티로 흥청거렸다.
서울에 주재하는 외교관들과 정부 대신들이 각기 다른 꿈의 축배를 올리고 있다. 1876년 일본과 첫 수교를 맺은 이후 조선의 문에는 더 이상 닫아 걸 수 있는 빗장이 없었다. 1882년 미국과 영국·독일에 잇달아 문을 열었고 1884년에는 이탈리아·러시아와 국교를 튼 그때의 조선은 지난달 칠레와 사상 첫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오늘의 한국을 연상시킨다.
지금, 미군기지가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는 용산이 바로 그 해 8월 일본의 요구로 외국인을 받아들일 ‘자유 지대’(開市場)로 문 열었던 것은 역사의 우연이기만 한 것일까.
1883년 인천항을 개항하고 이듬해 봄 부산과 나가사키 간 해저 케이블을 막 개통했을 정도로 조선은 급박한 개방의 물결을 타고 있었지만, 정작 나라를 어디로 끌어갈지에선 개화당과 수구당이 ‘속도’와 ‘폭’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양반이 상업에 종사하는 것과 상민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된 것이 겨우 2년 전인 1882년 말의 일이었다. 근대의 빛은 아직 어둠 속에 있었다.

▲ 1883년 말 미국 방문 길에 나선 민영익과 개화파 일행이 일본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이렇게 함께했던 이들은 일년 뒤 개화의 속도와 방법론을 놓고 동지에서 적으로 갈라서게 된다. 앞줄 오른쪽에서 둘째부터 서광범·민영익, 맨 왼쪽이 홍영식.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에 유길준이 보인다. 앞줄에 보이는 어린이는 당시 게이오의숙에 유학 중이던 박용화다.
“군(君)은 천(天)을 아는가.”
파티에 참석하고 있던 김옥균(金玉均)이 일본 서기관 시마무라(島村久)에게 물었다. 그대는 하늘을 아는가. “요로시(좋다)!” 시마무라가 즉각 답했다. 갑신정변 거사의 암구호였다. 좋다, 불길만 솟으면 이제 천하가 바뀌게 될 것이다.
‘각기 다른 꿈’들은 그날 파티 자리에서도 은밀히 타오르고 있다. 흥분과 기대, 그리고 막연한 두려움들. 개화파 젊은 지식인들을 지지했으나 정변에는 협력하고 싶지 않던 초대 미국 공사 푸트(Lucius H. Foote), 조선의 수상한 기운이 러시아의 확장을 가져올까봐 불안한 영국 영사 애스턴(William George Aston), 수구파를 손에 넣고 있는 청국영사 천서우탕(陳壽棠), 그리고 정변의 순간을 기다리느라 공사관에서 대기 중인 일본 공사 다케조에를 대신해 참석한 서기관 시마무라, 친청파인 외교고문 묄렌도르프…. 박영효와 개화당의 우두머리 김옥균, 바로 그날 밤 개화파의 처단 대상 목록에 올라있는 수구당의 거두 민영익·한규직·이조연도 한 자리에 있었다.
죽여야할 자를 바라보는 김옥균의 눈빛이 깊게 떨린다. 불길이 오르면, 그의 가장 친했던 친구이고 한때는 개화의 같은 꿈을 가졌던, 그러나 지금은 수구당의 가장 젊은 총아가 되어있는 민영익은 죽을 것이다. 그는 다만 그의 오래 전 친구가 고통 없이 단칼에 죽기를 바랄 뿐이다. 시간은 거침없이 흐르나, 기다리는 불길은 타오르지 않는다.
열강 틈바구니서 헤맨 20년…100년후 오늘과 '닮은 꼴'
거사의 주역들인 홍영식과 김옥균·박영효는 피가 마른다. 최초의 계획이었던 안동 별궁 방화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기별에 행동대원 유혁로가 급히 말한다. 죽여야 할 사람들은 그냥 이 파티 자리에서 죽여버리자. 김옥균은 실패로 돌아간 별궁 방화 대신 민가에 불을 지르라고 지시하고, 마침내 창 밖으로 불길이 치솟는다. 포성이 뒤따른다.
파티장은 삽시간에 수라장이 됐다. 외국 영사들과 고위 대신들은 불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장 먼저 불길을 향해 달려나갔던 민영익은 칼에 찔린 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한성을 불바다로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베어버리고, 그 피 위에서 혁명정강을 발표하게 될 갑신정변의 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김옥균과 홍영식·박영효·서광범 등 개화당 청년들은 그때 갓 스물셋에서 서른셋 사이였다. 전권부대신으로 미국의 신문물을 돌아보고 와 우정총국 총판이 된 홍영식의 나이 고작 스물아홉. 그들은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를 창간했고 치도국(治道局)과 한성 순경부(巡警部)를 만들어 국가 시스템 정비에 나섰다. 마침내 근대우편제도까지 도입하며 개화당이 얻어내려했던 것은 눈부신 근대의 속도였다. 좌절의 순간까지 멈출 수 없던, 멈춰서도 안 되었던 눈부신 속도.
“모든 평화수단은 끝났소.”
개화당의 맏형으로 꼽히던 서른셋의 김옥균. 1884년이 저물어갈 무렵, 그는 더 이상 수구파와 합의에 의해 개혁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 무의미하다고 선언했다. 김옥균은 개화당이 고종의 마음을 얻었다는 데 추호도 의심이 없었다. “무릇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국가의 대계를 그대가 생각한 계획에 맡길 터이니, 그대는 이에 대해 다시 의심하지 말라.” 이 말을 글로 쓰고 옥새까지 찍어준 것이 우정총국 낙성식 불과 닷새 전이었다. 김옥균 등은 군주의 마음이 수구파가 아닌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믿었다.
수구파는 청나라의 등에 업혀있었으나, 청은 이미 제 목숨도 지킬 수 없는 늙은 호랑이에 불과했다. 청은 바로 그 해 안남(베트남)을 놓고 프랑스와 전쟁에서 패해 그곳의 지배력을 상실해버린 몰락의 제국 아니던가. 그러나 청은 조선에서는 가장 강력한 외세였으며 수구파의 힘이었다. 중도파를 대변하는 김윤식조차 한가롭게 청나라 톈진(天津)을 유유자적하며 신문물을 보고 오겠다고 하지 않는가. 한때 개화당과 절친했던 민영익마저 이들의 초조함과 속도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개화당이 칼끝을 겨누어야 할 수구파의 가장 젊은 대표가 되었다.
왜 하필 일본이어야했는가. 침략자인 것이 분명한, 떠오르는 후발(後發) 제국. 언젠가 조선마저 완전히 삼켜버릴 욕심을 정한론(征韓論)을 통해 분명히 드러냈던 일본의 손을 그들은 왜 잡아야 했는가. 김옥균과 개화당의 눈에 민중의 힘은, 조선 근대화의 자생적 힘은 보이지 않았다. 미국은 적어도 당시까지는 조선의 정치에 개입할 의지가 없었다. 적어도 그들 눈에는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이 새로운 ‘국가 모델’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미 사지(死地)에 들어가 있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소, 아니면 먼저 치겠소? 우리에게 길은 한 가지뿐이오.” 김옥균과 개화당이 이날 토로한 진실은, 일본을 등에 업은 권력의 장악이 아니라 운명적인 애국충정이다. 적어도 혁명의 전야에는 그러했다.
스스로 밝지 않으면 불길로라도 밝혀야 했던 근대의 빛은, 그러나 아직 불길 뒤편 어둠 속에 있다. 외세를 등에 업은 외세의 배격, 혁명을 위한 무자비한 폭력, 친일의 족적(足跡)들, 마침내 10년 후 갑오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조선의 근대화를 제자리에 묶어버린 보수화, 혁명의 실패가 그들에게 덧씌울 오명도 역사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백 투 더 퓨처의 정치적 상상력은 아직 그들에게 허용되어 있지 않다. 잡느냐, 잡히느냐. 군주를 수중에 차지하고 천하를 잡기 위해 불길 속을 내달릴 뿐이다. 멀미 같은 밤이 숨가쁘게 깊어가고 이른바 3일 천하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日은 야욕, 淸은 늙은 호랑이, 美는 무관심
"주변 열강들의 경쟁·대립 이용했어야"
갑신정변 120주년과 러일전쟁 100주년을 맞이하는 현재 동북아의 국제정세는 한말(韓末)과 비슷하게 남북한을 둘러싼 주변 열강들의 경쟁과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역사적 실패와 좌절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한말에 한반도의 평화와 생존을 위해 ‘어느 국가를 의지하고 동맹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주변 열강의 이해 관계에 비춰볼 때, 19세기 후반 한반도는 주변 강대국들 간 흥정과 타협 그리고 이권쟁탈의 대상에 불과했다. 서쪽에 위치한 중국(청·淸)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진주한 청국 군대를 배경으로 조선의 외교와 국내 정치에 개입했다. 동쪽에서는 일본이 조선의 청국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면서 접근했다. 일본은 한반도를 자국의 안전에 필수불가결한 지역으로 간주하고 중국과의 전쟁에 대비했다.
북쪽으로는 제정(帝政) 러시아가 있었다. 시베리아 개발과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을 찾기 위해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진출을 본격화하면서 조선 정부에 접근했다. 그리고 남쪽에서 영국은 한반도를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완충지대로 여겼으며, 러시아 극동함대에 대비하기 위해 1885년 거문도를 불법점령했다. 프랑스는 가톨릭의 포교를 염두에 두었고, 미국은 조선의 위기 때 중재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지만, 실제로는 한반도에 무관심했다.
조선 정부는 주변 강대국들을 근대화의 모델로 여기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이들 국가에 대해 군사 교관 파견과 차관(借款), 경제교류 등을 통해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 노력을 지원해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조선의 이 같은 기대와는 상반되게 주변 강대국들은 서로 경쟁 내지 연합의 양상을 반복했다. 동북아 지역에서 특정 국가의 지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1882년 임오군란의 발발을 계기로 청·일 양국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한반도 진출 및 동북아의 맹주(盟主) 자리를 놓고 대립했다.
일본은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청국과의 전면 전쟁을 우려했다. 조선의 개화파를 사지(死地)에 남겨두고 철수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청국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군비를 강화하면서 조선 진출의 기회를 노렸다.
갑신정변으로부터 꼭 10년 후인 1894년, 조선 정부가 동학 농민군 진압에 나서면서 열강은 조선 땅에서 격돌했다. 조선 정부는 청국에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청국은 제한된 병력만을 파견했다. 반면 일본은 총동원령을 내려서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개전 초기 일본은 조선의 자주와 평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중국을 대신하여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를 실행에 옮겼다.
일본의 대륙 진출을 우려한 러시아는 삼국간섭(1895년)과 아관파천(1896년)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진출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 후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 간의 경쟁 속에서 한반도의 분할 지배가 거론됐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며 자국 식민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 입장을 지지했다. 일본은 서구와의 동맹 내지 암묵적 협조를 이끌어낸 후, 그동안 준비해 온 군사력과 전투경험을 기반으로 1904년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사실상 식민지화를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았다.
주변 국가들의 대(對)한반도 정책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던 조선 정부는 처음에는 중국, 그 다음에는 일본, 러시아, 미국에 외교적·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국제법과 한반도의 평화를 내세웠던 국가 중에서 조선이 믿고 의존할 만한 진정한 동맹국은 없었다.
한국이 도와줄 것으로 가장 기대를 걸었던 미국조차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중립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제일 먼저 한국에서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이런 20여년에 걸친 실패 경험을 돌이켜 볼 때, 조선이 취해야 하는 현실적 방안 중 하나는 특정 국가에 의존하기보다는 주변 국가 모두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주변 강대국 간 경쟁과 대립 양상을 활용하여 조선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를 보장받는 것이 모색돼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 이를 지탱할 만한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과 외교적 실무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력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그 결과 이 시기 조선의 운명은 부국강병과 개혁을 위한 ‘기회의 시기’가 되지 못했다. 그 반대로 한반도는 외세에 대한 짝사랑과 쇄국의 쌍곡선 속에서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됐다.
개화파 4人·민영익 ‘동지에서 적으로’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정계진출후 민영익과 開化공감
閔이 淸과 유대강조하자 결별
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 갑신정변 발발현장: 120년 전 갑신정변 발발의 현장이었던 우정총국의 현재 모습. 120년 세월 저편의 그곳은 피바람을 일으켜서라도 단숨에 국가 개혁을 이뤄내겠다는 개화당의 열망이 불탔던 곳이다.
동지에서 적으로. 갑신정변의 배경에는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 ‘개화파 4인’과 민씨 척족(戚族)의 젊은 거물 민영익의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다.
개화운동의 주동 세력이었던 김옥균 등은 민비(閔妃)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민영익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지만, 그가 청(淸)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함에 따라 개혁을 넘어 혁명을 선택한 것이다. 개화파의 리더 김옥균(金玉均·1851~1894)이 홍영식(洪英植·1855~1884), 서광범(1859~ 1897), 박영효(朴泳孝·1861~1939) 등 훗날의 동지들을 만난 것은 1870년대 중반 ‘개화파의 스승’ 박규수(朴珪壽·1807~ 1876)의 사랑방에서였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손자로 평안감사·우의정을 역임한 박규수는 1872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눈을 떴고, 1874년 벼슬에서 물러난 후 젊은 관리와 집권층 자제들에게 개화의 필요성을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이들은 모두 명문 출신이었다. 김옥균은 강릉부사를 지낸 안동 김문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1872년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한 엘리트 관료였다. 홍영식은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아들로 1873년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에서 근무했다. 서광범은 이조참판을 지낸 서상익(徐相翊)의 아들로 1880년 문과에 급제했다. 가장 지위가 높았던 박영효는 철종(哲宗)의 부마(駙馬·사위)로 왕실 가족이었다. 민영익(閔泳翊·1860~1914)은 1877년 과거에 급제하여 정계에 진출하면서 개화파를 만났다. 민비의 오빠로 민씨 일파의 수장(首長)이었던 민승호의 양자 민영익은 고종과 민비의 특별한 기대를 받은 ‘황태자’였다. 민영익과 김옥균 등은 새로운 국가 모델을 ‘개화’에서 찾으면서 급격히 가까워졌다. 외교 업무를 관장하고 있던 민영익은 일본·중국으로 잇따라 개화 시찰단을 파견하고, 각종 정부기구 개편과 신문 발행·차관 교섭·유학생 파견 등 급물살을 탄 근대화 움직임에서 개화파의 외교·경제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러나 민영익은 1884년 5월, 10개월에 걸친 미국·유럽 시찰을 마치고 귀국한 후 개화파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개화파가 청으로부터의 자주를 외치면서 일본에 기대어 개화를 추진하려는 것과는 달리 민영익은 청(淸)과의 유대를 강조했다. 그해 10월 군권(軍權)을 장악한 민영익은 일본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군에서 축출하는 등 개화파 활동을 제약했다. 그로부터 김옥균 등과 민영익은 ‘함께 국사(國事)를 논의할 수 없는 사이’(미국공사관 퍼어크 무관의 보고)가 되고 말았다.
고종, 김옥균이 재촉하자 日공사에 密旨…"짐을 지키라"
2. 군주를 장악하라―갑신정변 둘쨋날
◀ 905년의 창덕궁 인정전 모습. 창덕궁의 정전(正殿)인 인정전은 국왕이 집무를 보던 곳이다. 갑신정변 당시 급진개화파는 고종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거처를 옮기도록 이곳에 폭약을 설치했다.
불길로 시작된 1884년 12월 4일 정변의 밤이 자정을 향해 치달리고 있다. 피투성이가 된 민영익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우정국을 빠져나온 김옥균은 필사적인 힘을 다해 일본공사관으로 달려가고 있다. 창덕궁의 군주를 손에 넣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일본의 지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일이다. 병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거사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1882년의 임오군란 후, 청나라는 3000명의 청군을 조선에 주둔시켰다. 1884년 프랑스가 하노이를 점령하면서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조선 주둔군 중 1500명을 빼갔다. 김옥균과 개화당은 동대문 밖에 주둔하던 청군이 절반으로 줄자, 이야말로 ‘거사’를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무릎을 쳤으나, 청군과 맞설 일본 병력은 고작 120명에 불과했다. 일본 군대를 제외하고는 서재필 등이 이끄는 십수명의 사관생도와 그들의 보잘것없는 군대, 그리고 거의 텅 비어 있다시피 한 탄약상자와 장전도 제대로 안 되는 몇 자루의 총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개화당은 자칫 ‘청일 전쟁’으로 폭발할 수 있는 군사 충돌을 청군이 일으킬 리 없다고 확신했다.
최초의 불길이 솟자, 교동의 일본공사관 창가에 초조하게 붙어 서 있던 다케조에의 입이 비로소 벌어진다. ‘요로시!’ 그는 드디어 천하를 잡았다고 믿는다. 불길은 계속 번지고, 불붙은 민가는 비명 속에 깨어났으며, 그 소란 속으로 조선의 자객들과 일본의 낭인들이 총포와 무사도를 들고 죽여야 할 자들을 찾아 뛴다. 살육까지도 순수한 열정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개화파들이 정변의 밤을 달리던 그 거리, 그날 밤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껴안은 우정국 뜰은 이제 안온하고 우아한 도시 공원으로 변모했다. 근처 직장인들이 제법 완연해진 봄 기운을 즐기고 있는 이곳에서, 새삼 1884년이나 2004년이나 역사의 작동원리는 같다는 생각을 한다. 모든 변화는 속도 위에 있다. 그러나 속도를 받쳐주는 것은 바퀴이다. 페달을 밟는 ‘선수’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퀴의 무게이다. 오늘 이 나라를 굴리고 있는 바퀴인 민중들은, 페달의 속도가 아니라 자신의 무게를 믿는다. 그러나 120년 전 갑신년의 겨울 밤, 정변의 숨가쁜 순간을 내달리던 개화의 주역들은 스스로 페달을 밟았던 속도에 제가 먼저 현기증을 내고 있다.

다케조에 공사와 군사 동원의 약속을 확인한 김옥균은 바로 창덕궁으로 내달았다. 대기 중이던 김봉균과 이석이에게 인정전 아래 폭약을 매설하고 30분 후 폭파시키도록 명한다. 고종의 침전에는 윤경완이 군졸 50여명을 이끌고 거사의 밤을 지키고 있다. 난세의 군주는 은근과 끈기로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무능한 군주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의 강력한 자주를 꿈꾸었고, 조선의 힘을 위해 개화된 문명을 열망했으며, 청의 압력으로부터 나라를 방어하기 위해 개화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고종과 민비를 깨운 김옥균은 변란이 일어났음을 알리고, 세자 내외와 대왕대비 조씨, 그리고 홍대비까지 이끌고 경우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한다. 군주는 망설였으나 때마침 궁녀 고대수가 통명전에서 터뜨린 폭음에 완연히 공포에 사로잡힌다. 김옥균이 권하는 대로 그는 일본공사에게 밀지(密旨)를 내린다. “日本軍來護朕(일본 군대는 와서 짐을 지키라)” 김옥균이 지니고 있던 연필로 요금문 앞 길거리에서 쓰인 이 보잘것없는 밀지는 훗날 위조와 무효 논쟁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박영효가 밀지를 들고 일본공사관으로 달려갔을 때, 이미 다케조에는 출동준비를 마치고 있다. 고상한 유학자였던 다케조에도 이 순간만큼은 유교적 도덕심을 잊는다. 정변의 밤엔 이기고 지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그 밤 살육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다케조에가 이끄는 일군이 경우궁의 안팎에 포진하고, 개화파가 군주를 장악해 버린 다음에야 숨이 턱에 차 달려온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등은 군주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자객들에게 목이 잘린다. 누가 조선의 문신들은 칼을 지니지 못하게 하였단 말이냐. 피맺힌 절규를 내뱉으며 조영하, 민영목, 민태호도 차례차례 목이 날아간다. 아무도 죽이지 말라는 군주의 처참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내시감 유재현은 군주의 면전에서 목숨을 잃는다. 이날 개화당의 칼에 날아간 대신의 목숨이 11명에 이르렀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죽음은 또 얼마나 되는지, 미처 기록되지 못한 역사의 한 장면이다.
이 무자비한 칼바람 앞에서 고종은 참혹하게 질려 버린다. 개화파의 잔혹함에 대한 분노로 말미암아, 진보와 개혁에 대한 믿음마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런 군주의 마음을 읽을 여유가 개화당에는 없었다. 이번이 아니면 안된다, 수구의 목을 단번에 날려 버려야 한다. 그 잔인한 새벽, 개혁 정권의 각료 명단이 발표된다.
우의정 홍영식, 전후영사 좌포장 박영효, 좌우영사 겸 대리 외무독판 겸 우포장 서광범, 호조참판 김옥균, 병조참판 겸 정령관 서재필, 도승지 박영교. 대원군 쪽 인물들도 보인다. 대원군의 조카인 이재원은 좌의정을 맡았고, 이재원의 형 이재완은 병조판서를 맡았다. 대왕대비 조씨의 측근과 온건 개화파들도 각료 명단에 포함된다. 말하자면 거국내각. 그러나 벼락치듯 이뤄낸 정변의 둘째날 밝은 아침에 세상에 드러난 그 ‘혼합형’ 명단은 개화당이 그 정도도 자기들 세력만으로는 채울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젊었던 만큼 무모하기 이를 데 없던 조선의 개화당. 그들은 붓자국이 마르기도 전에 곧 스러져갈 혁명의 정강들을 힘있게 써내려가고 있었다.
一. 대원군의 즉각 송환을 실현하고 청나라에 대한 조공과 허례를 폐지함.
一 .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의 평등권을 이루고 인재등용에 있어 자리로써 사람을 택하지 않을 것임.
一. 지조법을 개혁, 관리의 부정을 막아 인민들의 곤궁함을 구하고 나라 재정을 넉넉하게 할 것임.
개화당이 가졌던 것은 거대한 이상과 한 줌의 힘, 그리고 성급함뿐이었는가.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일본 병력과, 이제 인질이 되어버린 군주뿐이다. 군주와 왕비의 끈질긴 환궁 요구를 묵살하고 개화파는 군주를 좌의정 이재원의 계동 집으로 옮긴다. 규모가 크지 않아 인질을 붙들어 놓기에 적합한 집이었다. 정작 군주의 환궁 요구를 들어준 것은 일본공사 다케조에였다. 유학자의 점잖음으로, 그러나 병력을 장악하고 있는 전략가로서는 턱없이 무지하게도 다케조에는 한 줌의 일본 군대로는 지켜내는 것이 불가능한 창덕궁으로 군주를 돌려보낸다.
바로 그 시간, 청군의 젊은 장교 위안스카이는 일본군과의 군사 충돌을 두려워하는 오조유에게 출병을 격렬히 주장하고 있었다. 훗날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퇴위시키고 혁명파인 쑨원마저 물리친 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될 그가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을 이끌고 온 것은 2년 전이었다. 정변 세력을 치러 나가자고 주장하는 그의 나이 스물여섯. 개화당 청년들과 동년배였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 과격한 이 청나라 군인은 늙고 겁 많은 상관들을 협박처럼 다그쳐들었다.
정변의 역사는 이처럼 외줄 위에 있다. 오랜 후의 사람들은, 많은 교훈을 갖고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무모한 당위에만 차 있는, 칼 끝에 묻힌 피의 힘밖에는 없는, 이 실패할 수밖에 없던 혁명을 단호히 정변이라 이름 붙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에 있어 중요한 것은 실패의 결과가 아니라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라는 것을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늘 도정이다. 실패의 원인은 실패의 결과와 함께, 120년 후 갑신년의 오늘을 밝힐 것이다.
/소설가 김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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