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읍에서 무주 쪽으로 약 8km쯤 가다가 다시 동쪽으로 금강 상류를 따라 4km를 거슬러 올라가면 상전면 수동리 죽도에 이른다. 덕유산에서 흐르는 구량천이 이곳 죽도를 휘감아 돌아 금강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삼면이 모두 맑은 물로 둘러쳐져 천혜의 경관을 자랑한다. 죽도는 대밭에서 솟은 죽순이 우거진 형상의 천반산이 산을 안고 도는 그 강 상류로 말미암아 육지 속의 섬을 이루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늘과 모래와 바위산과 나무가 어울려 극치를 이룬 절경, 그리고 호남일대에서 가장 맑은 금강 상류의 물이 바위산을 한바퀴 휘돌아 흐르면서 찾는 이들의 넋을 빼앗는다. 그러나 1976년 직강공사와 농경지 조성의 이유로 병풍 바위를 훼손하고 인공 폭포를 만드는 바람에 죽도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게 되어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천혜의 경관을 자랑하는 육지의 섬 죽도를 되살리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이 곳 죽도는 정여립의 최후 자결지로도 유명하다.

 

천하가 공물이니 어찌 주인이 있으리요.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을 물줄기가 감아 돌아가는 이 곳 죽도는 정여립 사건의 대미를 장식한 역사의 현장이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 이후 반역의 땅으로 남아야 했던 전라도. 우리는 전라도 사람으로서 이 사건의 올바른 진상을 파악하고 우리들의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4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정여립이란 인물과 그 사건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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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립의 한 품은 천반산

 

1589년 10월 2일 황해 감사 한준이 정여립의 모반 음모를 내용으로 하는 비밀 장계를 급히 조정에 올렸다. 이에 평소 도전적인 자세의 정여립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선조는 한밤중에 삼정승 이하 옥사를 다스릴 벼슬아치들을 불러들였다. 선조는 삼정승에게 정여립에 대해 물었다.

"여립은 어떤 인물인가?"

영의정 유전과 좌의정 이산해는 잘 알지 못한다고 하였고 우의정 정언신만이 "신은 오직 그가 글을 읽는 사람인 줄로만 압니다."라고 아뢰었다. 선조는 화를 내면서 한준의 비밀 장계를 승지로 하여금 읽게 하고, 이어 대신들은 정여립을 체포하고자 청하였다. 선조는 즉각 이를 허락하고 피비린내를 풍기면서 의금부 도사들을 모반지역으로 급파했으나, 여립은 그의 하수인인 안악의 변숭복에 의해 이 사실을 눈치채고 그의 아들 옥남, 그리고 동반자인 박연령의 아들 춘룡과 함께 죽도의 천반산에 숨어들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도피한 터라 동네에서 밥을 빌어먹고 아무 곳에서나 잠을 청하였다. 그런데 이를 수상히 여긴 동네 사람이 관아에 알리자, 진안현감 민인백이 관군을 이끌고 와서 정여립 일행을 순식간에 포위하였다.

대동계를 조직해서 변혁을 꿈꿔온 모든 시간들에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순간, 정여립은 칼을 빼내 변숭복을 치고, 옥남과 춘룡을 차례로 내리쳤다. 그리고 나서 칼자루를 땅에 꽂아놓고 목을 칼날에 대고 찔러 싸늘하게 식어갔다.

정여립은 도망과 자결로 오히려 역모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았고,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게 되었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은 '이발'을 비롯하여 무려 천여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으니 이것이 바로 기축옥사이다.

 


우리나라 역사의 첫 공화주의자 정여립

 

정여립은 동래 정씨 희증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사상가이다. 통솔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여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였는데, 명종 22년에 진사가 되고 선조 2년에 식년 문과 을과에 두 번째로 급제한 뒤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았다. 이에 일세의 이목이 정여립에게 집중되고 후에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이이의 천거로 수찬이 되었는데, 본래 서인이었나 이이가 사망하자 당시 집권 세력인 동인 편에 서서 이이를 배반하고 서인의 영수인 박순·성혼을 비판하였다. 이에 의주 목사 서익이 상소하여 여립의 배신을 공격하고 이 상소에 의해 정여립은 왕의 미움을 샀다.


상소 파문이 갈수록 확산되어 마침내 정여립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때가 선조 20년의 일인데 이로 인해 당시 동인이 쥐고 있던 삼사의 주도권이 서인으로 넘어간 해이기도 하다. 여립이 서인을 공격하게 된 연유는 확실치는 않으나, 그가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보다는 직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동인의 영수 이발과 잘 어울린 탓이 아닌가 싶다.

하여튼 어쩔 수 없이 관직을 버리고 내려오긴 했지만 여전히 동인 사이에는 인망과 영향력이 있어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를 찾아 인사했다 하고, 전라도 일대에 그의 명망이 높았다. 여립은 그 후 진안 죽도 천반산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시회를 여는 등 날로 세력을 확장시켜 갔다.

이들은 임진년에 있을 변에 대비하여 10만의 군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이이의 뜻에는 동감하여 열심히 무술을 연마하였다. 1587년 왜선 18척이 전라도 손죽도에 침범한 정해 왜변이 발발하였는데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에 의해 정여립의 대동계 무사들이 동원되어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훗날 여립을 평소 못마땅하게 여긴 서인들은 이 대동계가 불측한 일을 위해 조직되었다 하여 모반 음모로까지 연결지어버리지만, 오히려 호국정신이 깃든 우국충정의 단체라 함이 더 옳을 것이다.


어쨋든 그 뒤 대동계의 조직은 전국적으로 널리 확산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의 기인·모사의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그런데 1589년 이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하여 황해도와 해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는 고변이 황해도 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의 연명으로 급보되어 관련자들이 잡혔다.

이 때 정여립은 변숭복이 이 사실을 알려와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가 좁혀오자 자살하고 말았다. 정철이 위관이 되어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동인의 정예 인사는 거의 제거되었다. 이렇게 해서 비명에 숙청된 이들은 천여 명에 달하였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그의 진보적인 사상과 혁명성은 역모라는 이름 하에 묻혀지고 말았다.

 


조작설

 

정여립이 모반을 계획했고 그런 의사가 있었다면 어째서 단한 번의 저항도 없이 스스로 죽음으로써 최후를 맞이하였을까?

정여립 사건은 서인에 의해 이루어진 모함으로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참설에 전해져 오는 '여립이 어린 시절 자신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자질하여 책망을 듣게 한 동네 아이를 죽였다.' 는 이야기나 '어릴 적부터 제비나 찢어 죽이는 잔인한 인물'이었다는 등의 구전은 그의 모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꾸며낸 것들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여립의 도피는 안악의 교생 변숭복의 급보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는 수사의 손길이 자신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각종 서신 문서들을 집안에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동인의 무리들을 죽게 할 리 없다.

또 급보를 받고 도망간 곳이라면 과연 죽도를 택했을까? 이미 그는 죽도를 자주 찾아 '죽도 선생'이라 불릴 정도였는데 세상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기에 좋은 깊은 산을 두고도 연고지를 택했을까? 또 한가지 의문이 있다면 정여립의 자결이다. 옥남과 춘룡을 차례로 내려치고 나서 칼자루를 꽂아놓고 목을 칼날에 대고 찔렀다 하는데 그 동안 관군들은 구경만 했단 말인가? <동소만록>같은 야사에서는 '여립이 진안 죽도로 놀러 갔는데 선전관과 현감이 살해한 후 자결한 것으로 했다.' 고 전해지는데, 기축옥사의 후유증이 컸던 만큼 이설(異說)의 채택에 신중하였을 것으로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김장생이 엮은 <송강행록>에서는 정철이 정여립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진하여 옥사처리를 담당하였는데 이것은 정철이 그의 유인과 암살을 지령한 최고 지휘자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정철의 배후에는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지휘한 노비 출신의 송익필이 있었는데 서인의 참모 격으로 활약했던 사람이다. 이 송익필이 자신과 그의 가족 70여명을 환천시키고자 했으나 동인의 이발·백유양 등이 이를 반대하자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정여립 모반 사건의 조작에 동참한 것이라 보여진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정여립 모반사건을 조선후기를 얼룩지게 했던 당쟁의 역사에 도화선 작용을 한 사건으로 보고, 정여립을 당쟁의 희생물로 바라보았다.

 


모반설

 

정여립이 남긴 문장 중에 천하공물설(天下公物設)과 '누구를 섬기던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으로 본다면 이것은 그의 모반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사비군이란 말은 그 당시 사회 통념으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는 400년 전에 군신강상론을 타파하려 한 것이니 여립이 혁명성을 지닌 사상가라는 점은 분명하다.


목자(木子= 李씨) 망하고 존읍(尊邑= 鄭씨)은 흥한다.

요동에서 바라보니 동쪽 나라에 왕기가 있어 나와 보니 전라도 땅 남문 밖에서 뻗었다.

정팔룡이라는 신기로운 용맹 있는 사람이 곧 임금이 될 것인데 머지않아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


존읍(尊邑= 鄭씨)은 그를 가리키고 그의 어릴 때 이름이 팔룡이며, 그의 출생지는 남문 밖이다. 정여립이 이 낭설을 퍼뜨려 믿게 한 것은 곧 반역·모역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압수된 '제천무'에서는 선조의 실덕을 열거하였는데 이를 <연려실기술>에서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역적들의 문서 중에 정여립이 하늘에 제사 하는 제문이 일곱 장이나 나왔는데, 임금의 죄악을 말함에 있어서 특히 흉하고 참혹하였다." 그리고 여립은 왕조의 운수가 다했음을 논하고 천명의 이행을 기도하였다 한다. 선조 밑에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판단하고 혁명을 은밀히 생각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옥사에서 쓰러진 동인 명사들이 선조에게 등을 돌리는 자세에 있어 어느 정도의 공통점은 있으나 역모와는 관계가 없다고 보여진다.


 

반역의 땅? 전라도

 

정여립은 동인과 서인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인의 미움을 얻은 결과 무고하게 희생된 인물로 기축옥사의 장본인이 되어 동인의 정치권에 큰 타격을 주었다. 나아가 정여립 사건은 전라도는 반역향이라는 한 서린 공식에 결정적 빌미를 제공하여 훗날까지 호남 인재의 등용에 못을 박게 한 정치 사회적 대사변이다. 같은 전라도 출신인 송강 정철로 하여금 동향 사람인 정여립을 역적으로 몰아 전라도를 백안시하게 되어 지역차별의 분위기를 조성하게 된다.


일찍이 고려 태조가 남긴 훈요십조 가운데 제 8조를 보면 차령산맥과 금강 이남의 사람들은 반역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 지역 출신들을 등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후백제 견훤의 세력 토대가 되었던 지방이므로 그 잔존 세력들이 고려 왕조에 대해서 행할지도 모를 반항을 미리 막아보려는 조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후예들인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라를 잃은 백제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재건하려 했다면 이는 후세의 귀감으로 떠받들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이번에는 정여립이라는 한 인물의 정치적 성향을 문제 삼아 정확한 사실 규명도 없이 전라도를 반역향으로 규정하여 두고두고 차별을 하였으니 이렇듯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기나긴 호남 차별의 왜곡된 역사를 규명하고 그러한 잘못을 다시는 범하지 않기 위해서도 정여립 사건에 대한 연구와 평가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정여립의 정치 사상의 합리성에 대해서도 반드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꺽여진 야망, 정여립의 한(恨)

 

'정여립이 상두산에서 활을 쏘면 김제 황산까지 날아갔다고 하는데 정여립의 용마가 이 화살보다 먼저 황산에 도착했다 한다. 그런데 어느 날은 용마가 이 화살을 놓쳤는데 정여립이 화가 나서 용마의 목을 쳐버렸다. 후에 이것을 불쌍하게 여긴 정여립이 다시 용마를 선산 앞에 묻었다고 한다.'

정여립의 용마에 관한 전설은 여립의 진보적인 사상이 시기상조였음을 의미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살아있는 정여립 장군

정여립의 모반사건은 천여 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내는 옥사를 불러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전라도를 반역향으로 전락시켜 차별 받는 설움을 겪게 하는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현재 학계와 언론계에서 정여립 모반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노력을 다각화하고 있으며 호남을 중심으로 '정여립 선생 추모 사업회'가 발족단계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정여립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살펴본 것은 단지 정여립의 한 맺힌 누명을 풀어주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정치 사상과 혁명성을 정당하게 평가받기 위함인 것이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이 곳 전라도는 반역이 싹튼 땅이 아님을 알리며 그러한 이유로 차등 받아야 하는 전라도의 처우 문제는 우리들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야 한다.

정여립의 한, 호남의 한을 재조명함으로써 정여립과 함께 진정 살아 숨쉬는 전라도를 느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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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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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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