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부럽지 않은 고려 여성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 청년사, 1997, pp253∼264.
1. '첩 두자'는 상소에 팔 걷어부친 여자들
고려가 일부일처의 사회였던가 아니면 일부다처의 사회였는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법적으로는 일부일처였다가, 고려말이 되면 일부다처제였던 몽고의 영향으로 일부 관인층 사이에서 일부다처의 경향이 나타났다. →
박유사건 - 원간섭기 재상이었던 박유의 상소문
'우리 나라는 본래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지금 신분의 고하를 물론이고 처를 하나 두는 데 그치고 있으며 아들이 없는 자들까지도 감히 첩을 두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인원수의 제한이 없이 장가를 드는데 이대로 두었다가는 사람들이 모두 북쪽으로 몰려가게 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처와 첩을 두게 하되 그 관품에 따라서 그 수효를 줄여서 서인(庶人)에 이르면 한 명의 처와 한 명의 첩을 얻도록 법제를 만든다면, 원성은 줄어들고 인구는 번성될 뿐만 아니라 백성을 위하는 도리도 됩니다.'
이 상소문의 내용이 알려지자 부녀자들이 모두 박유를 원망하며 앞으로 변화할지 모를 상황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던 중 박유가 연등회를 보기 위해 나가는 것을 본 노파가 '첩을 두자고 건의한 거렁뱅이 늙은이다.'라고 외쳤고, 이에 주위의 여인네들이 모두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였다. 또한 당시 재상들 중에 자신의 아내를 무서워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박유의 건의는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다.
2. 시집살이 않는 여성, 처가살이하는 남성
고려는 결혼식을 처가집에서 하고, 결혼 후에는 일정 기간 사위가 처가살이를 했다. 따라서 '겉보리가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하지 않는다'라거나 '뒷간과 처갓집은 멀수록 좋다'거나, '출가외인'은 모두 조선시대 나온 말이다.
더욱이 처가살이를 계속해서 자신의 손자까지 처가에서 보는 경우도 있었다.
3. 아들 딸 차별없이 균등 상속, 균등 의무
손변이 경상도의 안찰사(按察使)가 되었는데, 그 고을에 남동생과 누이가 재산 문제로 송사를 벌이고 있었다. 남동생은 '한 부모에서 태어났는데, 어찌 누이 혼자 재산을 갖고, 동생은 그 몫이 없단 말입니까'라고 하였고, 누이는 '아버지께서 임종하실 때 전 재산을 나에게 주고 네가 가질 것으로는 검은 옷 1벌, 검은 관(冠) 1개, 신발 1켤레, 종이 한 장뿐이었으니, 어찌 이를 어기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송사가 여러 해 동안 해결되지 않았는데, 손변이 부임해 와서 이 송사를 듣고 이르기를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은 균등한데 어찌 장성하여 결혼한 딸에게는 후하고, 어미 없는 아들에게는 박하겠는가? 어린아이가 의지할 자는 누이였으니 만일 누이와 균등하게 재산을 물려주면 동생을 사랑함이 덜하여 잘 양육하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아들이 성장하게 되면 물려줄 옷과 관을 갖추어 입고서 상속의 몫을 찾기 위해 탄원서를 제출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종이와 붓 등을 유산으로 남겨 준 것이다.'라고 하니, 누이와 남동생이 서로 부여잡고 울었다.
→자녀간의 균분 상속은 곧, 그에 따른 의무로 균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죽어서는 부모에 대한 제사를 잘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명목으로 장자에게는 재산상속에서 20%를 더 받을 수 있었다. 이런 관행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어 1990년 민법이 개정될 때까지 호주는 재산상속분에서 5할(50%)을 더 가산받을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한편 고려시대 호적에는 아들·며느리와 동거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딸·사위와 동거하는 경우가 상당수에 달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4. 아내 재산 따로, 남편 재산 따로.
상속 받은 몫에 대한 여성의 재산권 행사가 인정되고 보호되었다. 한 예를 들면, 여성이 가지고 온 노비의 소유권이 결혼하여 남자 집에 산다고 해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부인이 재혼할 경우나, 또는 후손이 없을 경우에 부인쪽의 노비는 다시 친정으로 귀속됨으로써 노비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을 방지했다. 이는 결혼한 여성이 자신 명의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5. 이혼 문제
고려시대에는 이혼뿐만 아니라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조선시대에 여성의 재혼이 금지되고, 수절을 강요당한 것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혼율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고려인들은 쉽게 결혼하고 쉽게 헤어져 그 예법을 알지 못하니 가소로울 뿐이다.' ≪고려도경≫
물론 이혼을 요구하는 쪽은 여성측보다는 남성측이 훨씬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와 달리 이혼이 남성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 고래시대의 이혼은 남편과 부인 어느 한 편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아무런 이유없이 한 편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금지되었다. 또한 법적으르도 부모의 양해가 없어가 또 이유없이 처를 버리는 자는 관직에서 파직되고 유배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처럼 '칠거지악'이란 아주 애매한 조건으로 부인을 버릴 수는 없었다. 특히 가문을 중시했던 조선과 달리 애(아들)을 못 낳는 것을 이유로 부인을 버리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고려시대에는 아들선호사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6. 여성도 호주가 되었던 사회
고려시대에는 '양측(兩側)적 친속사회'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는 친족의 범위가 조선시대에 부계(父系)만을 강조하였던 것과는 달리 모계(母系)도 역시 거의 같은 비중으로 중시하고 있던 사회라는 의미이다. 오늘날 친족범위에 대한 민법(民法) 규정은 1990넌에 와서야 비로소 개정되어 부계와 모계 혈족 모두 8촌 이내로 되었다. 이 민법의 개정 이전에는 조선 후기 부계중심의 종법제도(宗法制度)의 영향으로 부계 8촌, 모계 4촌이었음을 상기해 보면 이제야 비로소 또 하나의 전통을 계승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관리 등용방식 중에서 과거제도 이외에 음서제도가 있었는데, 이런 음서제도에도 여성의 지위가 반영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성의 계보도 아주 중요시하게 여겨졌다.
고려시대 호적을 보면, 남편이 죽었을 경우에 비록 장성한 아들이 있더라도 어머니가 호주가 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또한 호적에 기록된 형제 자매의 서열 순서는 무조건 아들을 우선 순위로 기록하였던 조선시대와 달리 출생순서였다. 즉 누이와 남동생이 있는 경우 호족의 기록은 누이와 남동생 순서로 이루어졌다. 또한 묘지명 등의 기록을 보면 낳은 자녀의 수를 기록하는 데 있어서 무조건 '몇남 몇녀'라는 식으로 기록하지 않고 출생 순서에서 딸이 먼저일 경우에는 '몇녀 몇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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