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김용옥] 압록강수유시진(鴨綠江水有時盡)

차한연면무절기(此恨連綿無絶期)

압록강물이야 어느 땐가 다하련만

이 내 가슴 끓는 한, 그칠 기약조차 없어라.


40여 명의 식솔을 거느리고 평북 신의주를 떠난 배가 압록강의 거센 물결을 가를 때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이 읊은 시다. 때는 경술국치 바로 그해였다. 서울을 떠난 것이 1910년 12월 30일이었으니까 압록강을 건넌 것은 99년 전 오늘이었을 것이다. 우당 이회영은 누구인가?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이요, 당대 우리나라 최고의 거부! 아버지 유승(裕承)이 이조판서, 큰아버지 유원(裕元)이 영의정, 큰집 할아버지 계조(啓朝)는 철종 때 이조판서, 5대 조 종성(宗城)은 영조 때 영의정! 도무지 한 집안의 벼슬 이력으로 보아도 가히 비견키 어려운 명문 거족이요, 양평으로부터 서울까지 밟는 땅이 자기 땅이 아닌 곳이 없었다는 대부호!

이러한 이회영이 을사늑약을 막기 위한 배후노력을 했고, 을사오적 암살단의 자금을 대었고, 이상설을 만주로 파견해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게 하여 결국 명동학교가 그 학통을 이어갔으며, 헤이그 밀사 파견의 실제적인 주역 노릇을 했다. 그리고 신민회 운동을 돕다가 결국 나라가 기우는 것을 막을 길 없었을 때는, 그는 우리민족이 살 길은 서간도에 민족갱생의 신천지를 개척하여 국권의 적통을 이어갈 길뿐이라 판단, 즉각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나라가 왜놈들에게 먹히기 전에 재산을 전부 팔아 서간도 망명을 결의했는데, 건영·석영·철영·시영·호영, 6형제가 모두 의연히 동의했다는 것은 경패(敬佩)의 염을 금할 길 없다. 지금 우리나라가 외세에 의해 망하게 되었다면, ‘강부자’ 같은 최고의 거부들이 재산을 다 팔아 독립운동에 헌신할 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손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운운한다면, 조선왕조의 선비들이야말로 식민지사관에 의하여 왜곡된 모습으로 기술된 그러한 타락한 지배층이 아니었다. 석주 이상용 등 안동지역의 99칸짜리 집 부호들이 모두 이회영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들에 의하여 결국 통화현 합니하에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었고 그 학교에서 길러진 인물들이 결국 청산리대첩의 승보를 이룩했다. 그리고 이 주변인물들의 활약상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의 보이지 않는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현 이명박 정부의 공식적 입장을 대변하는 문화체육관광부는 ‘건국 60년’을 선포하고 선전하고, 미래세대 교육용 책자를 배포하고 있다: “대한민국 이전에는 국민이 아니라 신민(臣民)과 백성(百姓)이 있었을 뿐이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공로는 1948년 8월 정부수립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사실상 모태는 미군정기였다. 그리고 건국 이후 한국은 미국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60년’을 운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떻게 ‘건국 60년’을 운운한단 말인가? 60년 이전의, 단군 이래 반만년의 역사가 건국의 역사가 아니란 말인가? 어떻게 사가(史家)가 사실(史實)을 왜곡한단 말인가? 지난주, 60년밖에 안된 나라, 대한민국의 아르코 대극장에서는 한국연극 100주년 기념 전국창작희곡대상 당선작, ‘인간의 시간’이 공연되었다. 이회영의 삶을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나는 우당이 삶의 최후를 맞이한 다롄(大連)항의 수상경찰서 건물을 직접 가본 적이 있다. 우당은 심산 김창숙, 단재 신채호와 함께 ‘북경의 삼걸’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과도 교류했다. 그러나 1930년부터는 상하이(上海)에서 활약했다. 그는 상하이 지역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집단의 구심점이었다. 아나키즘이란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과도한 체제의 간섭을 거부하는 공동체운동이라 규정해야 옳다. 우당은 조선청년의 기백을 만방에 떨친 윤봉길의 훙커우공원거사(1932. 4. 29)에 충격을 받았다. 아나키스트들은 그 거사를 별도로 기획했으나 불발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우당은 윤봉길의 죽음을 명예롭게 만들기 위해 제2의 거사를 도모했다.

조선독립운동을 가장 악랄하게 탄압했던 일본 관동군의 사령관 무토오 노부요시(武藤信義·1863~1933)를 암살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황포에서 다롄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다롄항에는 그를 기다리는 아나키스트 동지 20명뿐만 아니라, 이들을 일망타진하려는 일본 수상경찰서원들이 잠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당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에게 가장 큰 자금을 댄 둘째 형님 석영의 아들의 밀고로 잡혔다. 조카 규서가 춥고 배고픈 삶 속에서 아편에 손을 댔다가 일본 밀정의 끄나풀이 되고만 슬픈 이야기를 여기 자세히 논할 필요는 없다. 참혹한 고문을 66세의 노구로 꿋꿋이 견디다가 절명하고 만다.

현 정부는 국민이 경제적 갈망 때문에 탄생시킨 역사적 정권이다. 그러나 재계에서 건설회사 운영으로 인식의 틀을 다진 이 대통령은 국가운영이라는 복잡다단한 신기(神器)의 세계를 너무 단순하게 이해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쇠고기 파동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환율문제도 너무 조작적인 유위(有爲)만 쌓아갔다. 그러면서 인기가 추락하게 되자 실용주의 노선조차 포기하고 어떤 이념적 핵을 만들어 난국을 타개하려는 묘수를 획책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경제 대통령의 이미지가 퇴색되자 이념 대통령으로 다시 탄생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추구하는 이념을 창조할 수 있는 사상가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건국 60년’을 운운하는 반민족주의 우파를 사상가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난 1년의 우리 정치사를 회고할 때 과거로부터 누적된 문제에 대한 서투른 개입은 있으나 새로운 질서를 개척하는 창조는 없다. 지금 이 대통령의 리더십의 업보는 결국 한나라당에로 귀속될 것이다. 한나라당의 생각 있는 리더들은 땅이나 파헤치고 민주적 가치를 훼손하는 현 정부의 행태를 근원적으로 재고케 하지 않는 한 ‘잃어버린 10년’은 ‘잃어버린 15년’이 되고 만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도올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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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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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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