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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이 프랑스경찰과 일본경찰에 붙잡히게 된 과정을 길게 소개한 데는 까닭이 있다.
이때 검거되어 7년 동안의 긴 세월 악명 높은 신의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루는 계기가 되었고, 극심한 고문과 추위로 동상에 걸려서 손가락 일곱 매듭을 절단하게 되었다. 조봉암의 회고를 조금 더 들어보자.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61631
프랑스 공무국에서는 경찰책임자인 프랑스인이 즉시 신문을 시작했고 그 문답 내용은 대개는 공원 안에서 프랑스 형사와의 그것과 같은 것이며, 나는 중국인 정상태라는 것과 공원에 산책갔었는데 까닭없이 불법 연행을 당했으니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일인 아카오와 공원까지 왔던 프랑스인 형사는 내 진술은 허위라는 것과 아카오가 말하던 모든 것을 거듭 되풀이하면서 일본영사관으로 넘겨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스인 책임자와는 그렇게까지는 양해가 못 되었던지 그 책임자는 말하기를, “이 사람이 중국인이라 하는데 중국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고, 또 당신들은 이 사람이 조선 사람이고 박철환이라고 하나 그 역시 우리로서는 증거 할 것이 없으니 지금 넘겨 보낼 수는 없소. 자세히 조사한 뒤에 좌우간 결정짓겠소”라고 했다.
그래서 일본 형사들은 뒤통수를 치고 돌아가고 나는 프랑스 공무국에 잡힌 몸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어찌하랴. 프랑스 공무국에는 한인 형사가 두 사람이나 현직으로 있었고 일본놈들은 중국인 정상태라는 것은 한인 조봉암이나 박철환과 동일인이라는 증거서류를 수백 매 만들어서 프랑스 경찰에 제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중국에 입적했었다고 주장해보았으나 그 증거서류도 제출할 수가 없었다. (주석 2)
프랑스 조계에서 피체된 조봉암은 12일 만에 일본경찰로 넘겨지고, 상해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서에서 20여 일 동안 수사를 받았다. 조봉암을 검거한 일본 경찰은 프랑스 경찰과 연합하여 프랑스 조계 내에 거주하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일제 검거에 나서 강문석ㆍ이종설ㆍ염용섭ㆍ김승락ㆍ장동선ㆍ이무성 등을 검거했으며, 한국으로 압송할 때 이들도 함께 하였다.
조봉암과 공산주의운동자들은 상해에서 경안환이라는 일본 기선에 태워져 12월 3일 인천항으로 압송되었다. 조봉암은 7년 만에 돌아온 고국이었지만 치안유치법위반 피의자 신분으로 꽁꽁 묶인 상태여서 먼 발치로 고향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음은 조봉암과 6명의 공산주의운동자들을 검거한 일본 상해 영사관의 사무관이 본국에 보고한 <조봉암 등 피의자의 행동 개요> 중 조봉암 관련 부분이다.
상해 조선인 공산주의자의 지도적 입장에 있는 조봉암은 22세 때 동경으로 가서 사회주의 조선인 김찬ㆍ정재달 등과 교류하며 사회주의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대정 11년 7ㆍ8월경 조선으로 돌아와 동년 9월 조선공산당 경성위원회에 의해 정재달과 함께 조선 대표로 선출되어 동년 11월 말 노령 우친스키에서 개최된 상해파, 이르크츠파의 연합대회에 출석했다.
또 모스크바에 있는 제 3인터내셔널로 가서 연락하고, 그 인연으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여 8개월의 교육을 받은 뒤 대정 12년(1923) 7월 모스크바를 출발해 블라디보스톡을 경유,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래 공산당 조직에 노력하면서 그 준비로서 신흥청년회를 조직하고 나중에 서울청년회와 연합해 조선공산당청년동맹을 조직했다.
대정 13년 고려공산당 조직을 제의하는 한편 러시아 공산당으로부터 파견된 김재봉 등과 협력하여 대정 14년(1925) 5월 17일 경성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를 열고 이어 동월 19일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를 마찬가지로 경성에서 거행했다.
대정 14년 5월 중 본인은 위 양 단체의 승인운동을 위해 조동우와 함께 모스크바로 파견되게 되었다. 5월말 본인은 상해를 경유해 모스크바로 가서 운동한 결과 고려공산청년회는 국제공산청년회 조선지부 조선공산청년회로 승인을 받고, 이어 조동우는 동년 12월 모스크바로 가서 조선공산당을 국제공산당 조선지부 조선공산당으로 승인받기에 이르렀다.
조선에서 공산당 조직이라는 대임을 맡은 본인은 다시 만주로 파견되어 대정 15년(1926) 7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하고, 대정 15년 7월 상해에 국제공산당 원동부가 설치되자 조선공산당 대표로서 여기 참가했다.
소화 2년 9월 중 홍남표ㆍ여운형ㆍ구연흠 등이 중국공산당 한인지부를 창립하자 측면에서 원조하다가 소화 3년 1월에는 본인도 여기에 가입하여 지부 책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그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조선의 독립을 촉진할 목적으로 소화 2년 (1929) 4월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를 조직하고 그 운동에 종사했는데, 동회가 소화 4년 10월 26일 해체되었으므로 다시 동일 구연흠을 중심으로 해서 유호(상해거류) 한국독립운동자 동맹을 조직했지만, 소화 5년 (1930) 9월 구연흠이 체포되었기 때문에 다시 홍남표ㆍ장태준 등 동지와 모의하여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조직하고 모든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식민지 및 반식민지에서 민족해방운동을 지지하고 조선혁명의 지대적 임무를 수행한다는 목적으로 활동을 계속해 온 자이다. (주석 3)
조봉암의 해외 활동이 자세히 적혀 있다.
일제 경찰이 조봉암의 활동을 샅샅이 추적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트렁크ㆍ버들고리 등 10개에 달하는 한인지부가 발행한 ‘불온인쇄물’과 반제동맹강령ㆍ규약ㆍ선언ㆍ정치결의안ㆍ기타 각종 선전문ㆍ지령ㆍ강령 등 277점을 압수했다고 보고했다. (주석 4)
주석
2) 앞의 책, 355~356쪽.
3) 이촌수수(泥村秀樹)ㆍ강덕삼 편, <현대사자료(29) 조선(5)>, 동경원서방, 442~445쪽, 1972.
4) 앞과 같음.
이때 검거되어 7년 동안의 긴 세월 악명 높은 신의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루는 계기가 되었고, 극심한 고문과 추위로 동상에 걸려서 손가락 일곱 매듭을 절단하게 되었다. 조봉암의 회고를 조금 더 들어보자.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61631
프랑스 공무국에서는 경찰책임자인 프랑스인이 즉시 신문을 시작했고 그 문답 내용은 대개는 공원 안에서 프랑스 형사와의 그것과 같은 것이며, 나는 중국인 정상태라는 것과 공원에 산책갔었는데 까닭없이 불법 연행을 당했으니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일인 아카오와 공원까지 왔던 프랑스인 형사는 내 진술은 허위라는 것과 아카오가 말하던 모든 것을 거듭 되풀이하면서 일본영사관으로 넘겨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스인 책임자와는 그렇게까지는 양해가 못 되었던지 그 책임자는 말하기를, “이 사람이 중국인이라 하는데 중국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고, 또 당신들은 이 사람이 조선 사람이고 박철환이라고 하나 그 역시 우리로서는 증거 할 것이 없으니 지금 넘겨 보낼 수는 없소. 자세히 조사한 뒤에 좌우간 결정짓겠소”라고 했다.
그래서 일본 형사들은 뒤통수를 치고 돌아가고 나는 프랑스 공무국에 잡힌 몸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어찌하랴. 프랑스 공무국에는 한인 형사가 두 사람이나 현직으로 있었고 일본놈들은 중국인 정상태라는 것은 한인 조봉암이나 박철환과 동일인이라는 증거서류를 수백 매 만들어서 프랑스 경찰에 제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중국에 입적했었다고 주장해보았으나 그 증거서류도 제출할 수가 없었다. (주석 2)
프랑스 조계에서 피체된 조봉암은 12일 만에 일본경찰로 넘겨지고, 상해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서에서 20여 일 동안 수사를 받았다. 조봉암을 검거한 일본 경찰은 프랑스 경찰과 연합하여 프랑스 조계 내에 거주하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일제 검거에 나서 강문석ㆍ이종설ㆍ염용섭ㆍ김승락ㆍ장동선ㆍ이무성 등을 검거했으며, 한국으로 압송할 때 이들도 함께 하였다.
조봉암과 공산주의운동자들은 상해에서 경안환이라는 일본 기선에 태워져 12월 3일 인천항으로 압송되었다. 조봉암은 7년 만에 돌아온 고국이었지만 치안유치법위반 피의자 신분으로 꽁꽁 묶인 상태여서 먼 발치로 고향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음은 조봉암과 6명의 공산주의운동자들을 검거한 일본 상해 영사관의 사무관이 본국에 보고한 <조봉암 등 피의자의 행동 개요> 중 조봉암 관련 부분이다.
상해 조선인 공산주의자의 지도적 입장에 있는 조봉암은 22세 때 동경으로 가서 사회주의 조선인 김찬ㆍ정재달 등과 교류하며 사회주의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대정 11년 7ㆍ8월경 조선으로 돌아와 동년 9월 조선공산당 경성위원회에 의해 정재달과 함께 조선 대표로 선출되어 동년 11월 말 노령 우친스키에서 개최된 상해파, 이르크츠파의 연합대회에 출석했다.
또 모스크바에 있는 제 3인터내셔널로 가서 연락하고, 그 인연으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여 8개월의 교육을 받은 뒤 대정 12년(1923) 7월 모스크바를 출발해 블라디보스톡을 경유,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래 공산당 조직에 노력하면서 그 준비로서 신흥청년회를 조직하고 나중에 서울청년회와 연합해 조선공산당청년동맹을 조직했다.
대정 13년 고려공산당 조직을 제의하는 한편 러시아 공산당으로부터 파견된 김재봉 등과 협력하여 대정 14년(1925) 5월 17일 경성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를 열고 이어 동월 19일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를 마찬가지로 경성에서 거행했다.
대정 14년 5월 중 본인은 위 양 단체의 승인운동을 위해 조동우와 함께 모스크바로 파견되게 되었다. 5월말 본인은 상해를 경유해 모스크바로 가서 운동한 결과 고려공산청년회는 국제공산청년회 조선지부 조선공산청년회로 승인을 받고, 이어 조동우는 동년 12월 모스크바로 가서 조선공산당을 국제공산당 조선지부 조선공산당으로 승인받기에 이르렀다.
조선에서 공산당 조직이라는 대임을 맡은 본인은 다시 만주로 파견되어 대정 15년(1926) 7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하고, 대정 15년 7월 상해에 국제공산당 원동부가 설치되자 조선공산당 대표로서 여기 참가했다.
소화 2년 9월 중 홍남표ㆍ여운형ㆍ구연흠 등이 중국공산당 한인지부를 창립하자 측면에서 원조하다가 소화 3년 1월에는 본인도 여기에 가입하여 지부 책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그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조선의 독립을 촉진할 목적으로 소화 2년 (1929) 4월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를 조직하고 그 운동에 종사했는데, 동회가 소화 4년 10월 26일 해체되었으므로 다시 동일 구연흠을 중심으로 해서 유호(상해거류) 한국독립운동자 동맹을 조직했지만, 소화 5년 (1930) 9월 구연흠이 체포되었기 때문에 다시 홍남표ㆍ장태준 등 동지와 모의하여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조직하고 모든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식민지 및 반식민지에서 민족해방운동을 지지하고 조선혁명의 지대적 임무를 수행한다는 목적으로 활동을 계속해 온 자이다. (주석 3)
조봉암의 해외 활동이 자세히 적혀 있다.
일제 경찰이 조봉암의 활동을 샅샅이 추적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트렁크ㆍ버들고리 등 10개에 달하는 한인지부가 발행한 ‘불온인쇄물’과 반제동맹강령ㆍ규약ㆍ선언ㆍ정치결의안ㆍ기타 각종 선전문ㆍ지령ㆍ강령 등 277점을 압수했다고 보고했다. (주석 4)
주석
2) 앞의 책, 355~356쪽.
3) 이촌수수(泥村秀樹)ㆍ강덕삼 편, <현대사자료(29) 조선(5)>, 동경원서방, 442~445쪽, 1972.
4)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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