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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근대국가 확립 그리고 조선 침략
10.26 하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 김재규의 총에 목숨을 잃은 날로 기억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100년 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사살된 날이기도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한국에서는 침략의 원흉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만, 일본에서는 1980년대 초반까지 천엔짜리에 그의 얼굴이 나올 정도로 일본 근대를 만든 인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한일역사교육교류모임에서는 일본 근대사를 전공하신 방광석 선생님(고려대 동아시아문화교류연구소)을 모시고 이토 히로부미가 근대일본 국가체제 확립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일시 : 2009년 10월 27일 화요일 오후 6시 30분부터
장소 : 전국역사교사모임 사무실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30명까지만 모임홈피 게시판 댓글로 선착순 신청을 받습니다.
참가비 : 5,000원
최근에 나온 <한국과 이토히로부미>라는 책에 대한 신문 서평에는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다음과 같이 엇갈리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토 유키오 교수 논지의 요점은 이토 히로부미가 당초에는 합병을 하지 않은 상태로 한국의 근대화 및 한일 간 융화를 지향했지만, 한국 측에 그 진의가 충분히 이해되지 않아 좌절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자세는 합방을 목적으로 했다기보다는 한국인의 자발적인 협력을 확보해 저비용으로 한국의 근대화를 실행해 일본, 그다음으로 한국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반면 방 교수는 한국 학계의 통설대로 이토가 일본 정부의 방침으로부터 벗어난 일이 없으며, 시종일관 합방을 도모했다는 논지를 전개했다. 방 교수는 "이토는 한국의 식민 지배를 전면에서 지휘하기 위해 건너왔다. 따라서 ''보호통치''를 시작하는 단계부터 한국병합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라며 "한국민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해 보호통치가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즉시병합론에 동조하게 됐다"고 결론지었다."
(국민일보, 2009.6.26)
10.26 하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 김재규의 총에 목숨을 잃은 날로 기억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100년 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사살된 날이기도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한국에서는 침략의 원흉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만, 일본에서는 1980년대 초반까지 천엔짜리에 그의 얼굴이 나올 정도로 일본 근대를 만든 인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한일역사교육교류모임에서는 일본 근대사를 전공하신 방광석 선생님(고려대 동아시아문화교류연구소)을 모시고 이토 히로부미가 근대일본 국가체제 확립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일시 : 2009년 10월 27일 화요일 오후 6시 30분부터
장소 : 전국역사교사모임 사무실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30명까지만 모임홈피 게시판 댓글로 선착순 신청을 받습니다.
참가비 : 5,000원
최근에 나온 <한국과 이토히로부미>라는 책에 대한 신문 서평에는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다음과 같이 엇갈리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토 유키오 교수 논지의 요점은 이토 히로부미가 당초에는 합병을 하지 않은 상태로 한국의 근대화 및 한일 간 융화를 지향했지만, 한국 측에 그 진의가 충분히 이해되지 않아 좌절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자세는 합방을 목적으로 했다기보다는 한국인의 자발적인 협력을 확보해 저비용으로 한국의 근대화를 실행해 일본, 그다음으로 한국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반면 방 교수는 한국 학계의 통설대로 이토가 일본 정부의 방침으로부터 벗어난 일이 없으며, 시종일관 합방을 도모했다는 논지를 전개했다. 방 교수는 "이토는 한국의 식민 지배를 전면에서 지휘하기 위해 건너왔다. 따라서 ''보호통치''를 시작하는 단계부터 한국병합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라며 "한국민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해 보호통치가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즉시병합론에 동조하게 됐다"고 결론지었다."
(국민일보, 2009.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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