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찍어서 중국에서 보내준 사진>
유서깊은 명동촌
용정시 지신향 명동촌은 조선 회령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삼합진을 지나 삼합진과 지신진 두개 진의 경계선으로 되여 있는 오랑캐령을 넘어 용정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회령에서 북으로 40리,지신진소재지 달라즈(1920년대에는 한시기 화룡욕통상국의 소재지와 화룡현조재지로 되여 있었슴)에서 7리이고 명동촌에서 룡정까지는 30리이다.또 조선 종성까지는 동으로 약 50리 거리다.
명동촌동쪽에는 장재촌으로부터 선바위에 이르는 뒤산이 동구에서 용암촌 뒤산에 이어져서 중영촌,상촌아산(삼원봉)까지 이어진 산맥으로 둘러져 있고 마을 중간은 남에서부터 북으로 륙도하가 흐르고 강서쪽의 대사동,소사동 마을은 높은 산맥으로 둘러싸인 남북 10리,동서5리나 되는 아득한 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명동이란 <조선을 밝게 하자>는 의미로서 장재,이호동,동구,용암,수남,풍악,중영상,하촌 성교촌,교우촌,그리고 륙도하 건너 서쪽의 대,소사동 등 10여개 부락을 합친 총칭이다.
1881년 청나라정부에서 연변에 대한 봉금령이 해체될 전후 조선이주민들이 이곳에 들어와서 상술한 크고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당지의 중국인지주 동란 3형제의 토지를 소작하며 살고 있었다.
1899년 김약연을 중심으로 한 전주김씨가문 31명,김하규(15만 탈취사건중 일원인 최봉설의 장인)를 중심으로 한 김해김씨가문 63명,문병규를 중심으로 하는 문씨가문 40명,남종구를 중심으로 한 남씨가족 7명과 그 먼저 명동에 들어와서 동 지주와 토지구매,이사 등을 교섭하던 김항덕 등 142명이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여 1899년 2월 18일 조선 종성에서 두만강을 건너 자동촌을 거쳐 명동으로 이주하여 왔다.
김약연은 맹자에 정통하였으며 김하규는 주역에 정통하였고 한북학회의 함북도 지회장이였다.남도천은 학문이 깊어 함경도에서 서울에 추천하였으나 벼슬을 거절하였다.하여 사람들은 그이 본명인 종구라고 부르지 않고 남도천이라고 불렀는데 김약연의 은사였다.
1900년에 종성대안으로 이주하였던 윤하현(윤동주의 조부)의 일가 18명이 명동으로 이주하여왔다.문씨와 윤씨들은 모두 종성 오현(钟城五贤)의 문하사람으로서 모두 뜻이 맞는 가족들이였다.
그들은 모두 관북의 실학파였지만 벼슬길이 막혔다고 실망하지 않고 벼슬을 위해서가 아니라 <글을 모르면 남에게 천시당한다>,<아는 것이 힘이다>고 하면서 양반귀족 못지 않게 학문을 닦았고 리론보담 시철을 귀중히 여겼다.때문에 그들은 비록 유학은 읽어도 손수 밭농사,집짓기를 하면서 후학들을 공부와 노동이 결합된 인간으로 양성하기에 힘썼다.
그들은 단결된 공동체의 힘으로 <밝은 조선>을 건설할 인재를 육성하는데 모를 박았다.즉 집단적으로 토지를 사들여 제일 좋은 10분의 1의 토지를 학교밭으로 떼 놓고 서당을 꾸리였다.김약연은 장재촌에 규암제서당을,김하규는 대사돈에 소암재를,남위원은 중여촌에 한함서재를 꾸리고 공부하면서 농사를 지었다.이렇듯 1899년 142명의 집단이주가 있은후 그들을 핵심으로 <새 조선인>마을이 뿌리 내려졌다.
1907년 8월,일본제국주의는 <조선사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연변에 침입하여 용정에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세우고 명동촌 주변인 종성대안의 하천평,호천가,회령대안인 우적동,조양천,동불사 등지에 헌병분견소를 설치했으며 1909년 9월 <간도협약>이 체결된후 용정,투도구,국자가,배초구와 훈춘 등지에 영사관과 분관을 설치하고 조선인을 통제하였다.이런 상황에서 연변에서 활동하던 이동녀으려준,이상설 등이 연변을 떠났다.그러나 명동촌 반일인사들은 자기 자체로 일제의 감시와 취제를 피하면서 반일운동을 계속 진행하였다.그들은 더욱 단합하여 학교교육을 강화하여 반일인재양성에 힘썼다.
1908년 김약연은 서전서숙이 일제의 탄압으로 페교된후 박우림을 초빙하여 마을 각곳에 있는 서숙들을 합병하여 <명동서숙>으로 확대하고 박우림을 숙장으로,자신이 학감을 담임하고,김하규,남위언 등을 교원으로 근대교육과 반일교육을 진행하였다.
1909년 신민회에서는 정재면을 파견하여 명동에 왔다.명동에서는 그를 초빙하였으나 정재면은 <마을에서 기독교를 신앙하고 학교에서는 성경과를 정식과목으로 해야만 초빙에 응하겠다>는 조건부를 내 놓았다.그러면서 그렇게 하겠다면 자기뿐 아니라 유명한 교원들을 추천하겠다고 하였다.유학자들에게 있어서 이 요구는 <청천벽력>이 아닐수 없었다.그래서 명동인사들은 연속 3일간 쟁논을 거쳐 대를 이어 숭상하던 유학을 견결히 포기하고 정재면의 요구를 받아들여 기독교를 신앙하기로 하였다.그래서 1909년 명동학교를 개칭하고 당시 쟁쟁한 학자들인 박태현,장지연,황의돈 등 열렬한 반일의사들을 교원으로 초빙하였다으며 명동교회도 성립하였다.
명동에서의 이 획기적인 변화는 자못 심대한 의의를 갖고 있따.그것은 단순히 기독교를 신앙하는 문제가 아니라 문화계몽운동에서의 신구투쟁에서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낡은 문화사상과 결연히 단절하고 기독교라는 신앙조직을 통하여 진보적이며 민주적인 참신한 근대문화를 접수하겠다는 의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그것은 오로지 후일에 <발은 조선>을 건설할 인재를 배양하려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명동의 상술한 결정은 연변지역 뿐 아니라 남북만 나아가서는 연해주 지방에 까지 영향을 주었다.연변 각지에서는 명동을 따라 근대중학교를 육속 세웠고 연해주와 북만에서는 명동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다.명동이 이렇게 될수 있은 것은 당시 일제나 중국당국이 외래교로서의 <기독교를 간섭>하지 않느다는 정책을 ㅣ용하여 명동학교에서는 기독교라는 종교조직을 통하여 근대교육과 반일교육을 진행하고 대회로 개방하였기 때문이다.
1909년말 이동휘는 전도사의 신분으로 명동교회의 부흥사경회에 참가하여 김약연과 기탄없이 민족운동에 대하여 담논하였고 1911년 이동휘의 건의에 의하여 명동 여학부를 개설하였고 이동휘는 자녀 이회순을 교원으로 파견할 것을 약속하였다.이때부터 명동의 여성들은 여자식자반 야학부에서 계몽교육을 받았다.그때까지 자기의 이름도 없던 60여명의 여성들은 신(信)자 돌림으로 이름을 지어 자매관계를 맺어 여성들의 단결을 강화하게 되였다.이렇듯 명동학교와 명동촌의 솔선수범행동은 간도문화운동과 교육운동에 마멸할수 없는 여향을 주었다.
1910년 3월 민족교육을 반전시키기 위해<단민교육회>를 조직하고 <월보>를 발간하였다.
1911년 봄,기독교 전도사의 신분으로 명동교회의 사경회를 순시하는 명의로 연변에 온 이동휘는 이동춘,김약연 등과 친목하면서 간민교육회의 사업을 적극 지지하면서 명동중학교의 사업을 긍정학 김립이 로씨야의 이종호를 통하여 얻어온 금액으로 국자가 소영자에 반일인재를 양성하는 학교를 세우고 간민회의 회장인 이동춘이 교장을 담임하였고 김약연은 간민교육회의 총무를 겸하였다.1913년 5월 김약연이 회장으로 김립,이동춘,장기영,백유정,남공선,박찬의 등이 서무,교육,법율,식간,호적조사 등 부서의 책임을 졌다.
김약연은 간민회의 회장을 담임하면서 연변 각지에 명동촌과 명동중학의 경험을 보금하면서 연변을 건실한 반일운동기지로,각지 사립학교를 민족인재양성의 요람지로 건설하기 위해 힘썼는바 그중 와룡도의 창동학원,후동촌의 정동중학,소영촌의 길동학교 등이 당시 연변지역의 명망높은 반일 학교로 되였다.
1914년 겨울,일제의 간섭으로 중국정부에 의하여 해산되였으나 간민회 성원등ㄴ 계속 간민교육연구회의 활동을 통하여 수많은 청소년들을 반일인재로 양성하였느바 그후 3.13반일운동과 반일무장투쟁의 선봉으로 되였다.
간민교육회시기부터 명동촌사람들은 모두 중국국적에 가입하였기에 일본군경들이 중국당국의 허가없이 마음대로 명동촌을 수색할수 없었다.하여 명동촌은 반일교육의 요람과 반일기지로 될수 있었다.
명동촌은 지방주의나 각 단체간의 파벌모순이 기본상 없었으며 간민회 김약연회장의 통일적인 지도하에 부근은 물론 각 지방,학교간의 연계와 단결도 매우 좋았다.
1919년 2월 12일,김약연을 중심으로 간도대표를 니꼬리스크에 파견하여 국민의회에서 독립선언서를 기다렸다.그러던 서울에서 3월 1일에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였다.이 소식을 들은 간도지방에서는 독립선언서를 기다리지 않고 3월 13일 용정에서 3만여명이 모여 반일대집회와 시위를 진행하였다.
명동학교에서는 정동 등 학교와 함께 300여명의 충열대(忠烈队)를 조직하여 시위운동의 앞장에 섰다.중일반동군경들의 탄압으로 19명이 회생되고 48명이 부상당하였다.
순국의사들의 원쑤를 갚기 위해 한상호,최봉설,임국정 등은 울라지보스또크에 가서 권총 3자루,보총 1자루와 수류탄 여러 개를 가져왔다.1920년 1월 4일 윤희정,임국정,김준 등 6명은 지신향 수성촌에서 조선은행 회령지행으로부터 용정출장소로 보내는 조선은행권 15만원을 탈취하였다.
명동은 간도국민회건립이후 남부총회의 본부로 되였고 명동학교는 총부사무실로 되였다.총회에서는 <독립신문>,<우리들의 편지>를 발간하였고 또 청년학우회에서 <청년>,<자유의 종> 등의 신문을 간행하여 민중들에게 반일민족사상을 선전하여 민중들의 반일투지를 고무,격려하였다.
여성들도 독립군을 위하여 양식을 거두고 군복을 만들었으며 통신연락을 하였다.
일제는 명동을 <불령선인의 소굴>로 간주하고 감시와 취체를 늦추지 않았다.
1919년 3월 21일,간도반일교육의 선구자이며 반일운동의 영도자인 김약연이 로씨야에서 돌아오자 일본경찰들은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여 날뛰였다.그러나 중국국적에 입적한 김약연은 청나라 당국에 의해 2년동안 <연금>되여 일제의 체포망을 피할수 있었다.
1920년 일제는 2만여명의 병력을 출동하여 연변에 대한 대토벌을 감행하여 3,400여명을 살해하고 5,000여명을 체포하였으며 3,000호의 민가와 36개의 학교를 소각하였으며 수십만섬의 곡식을 소각하였다.
<불령선인의 소굴>로 간주된 명동은 일제의 중심토벌지역이였다.10월 15일,일본헌병대는 5명의 <수상>한 학생을 미끼로 14명을 체포하고 10월 19일에는 명동학교를 수색하고 <반일근거지>를 이유로 학교와 남부지방총회장 마진의 집을 소각하고 돌아갔다.일제의 토벌로 15년동안 민중의 힘을 합쳐 건설한 명동반일기지는 파괴되였다.
명동마을과 명동학교가 무수한 민족해방운동가,반일저항투사와 학자,문인들의 운명과 혈연을 맺어 후세에 명성을 날렸다.이곳에는 <북간도의 대통령>이라고 호칭 받은 김약연을 비롯하여 이동휘,정재면,황의동,한준명,송몽규,라운규,김창걸도 그렇겠지만 윤동주와의 인연으로 하여 명동마을은 더구나 유명해졌다.
소년 윤동주가 다른 누구 보담도 명동의 풍토인정에 푸근히 몸 담그고 자란 곳이다.그의 28세 생애의 절반이 묻혀 숨쉰 곳이다.명동의 우물속에는 그이 <자화상>이 비껴있다.<새 명동>잡지에는 시인으로 될 그의 꿈이 싹터있다.<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백의겨레의 넋속에 하나의 새로운 사상을 비쳐보인 선도자---윤동주시인이다.
명동촌은 1910년대와 20년대초에 간도조선인들의 반일운동의 중심기지로 작용하였으며 민족독립운동에 마멸할수 없느 공적을 역사에 남긴 유서깊은 마을이다.


Powered by X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