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보에 대하여-
농암 이현보는 연산군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연산군 - 중종 - 인종 - 명종 등 4대를 섬기면서 무려 44년(32세에서 76세까지) 간이나 벼슬아치로 봉직하였다. .
영천이씨인 농암은 서른둘에 관직에 나아간 이래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에 이르기까지 사림파가 화를 입는 시기 동안 사림파이었음에도 천수를 누렸던 인물이었다.
연산군 때 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직언하였다가 안동으로 좌천한 이후 그는 주로 외직을 자청하여 아홉 고을의 수령과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는데 치적이 우수하여 여러 차례 포상을 받았으며, 청렴 결백하여 청백리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그는 외직을 역임하는 동안 향토에 기반을 둔 사대부 계층의 향촌 자치기능 강화에 역점을 두고 고을을 다스렸는데, 벼슬에서 은퇴한 뒤에는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처사적(處士的) 삶의 방식을 개발해 내는데 몰두하여, 후배인 이황이나 이황의 제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강호생활(江湖生活)의 풍류(風流)를 즐기는데는 읊기만 하는 한시보다도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국문시가가 더 유용하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스스로 「효빈가(效嚬歌)」,「농암가」,「생일가」같은 단가(당시는 아직 시조창이 나오기 이전이므로 시조라는 명칭이 없었음)를 짓기도 하였다.
또한 83세 때 잊혀져 가던 「어부가」(12장)를 재발견하여 이를 개작하였는데, 이현보에 의하여 개작된 「어부가」(9장)는 흔히 농암 「어부가」로 불리며 조선후기의 한국문화(문학과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출처] 이현보 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농암은 그의 자호이다. 그는 마을 앞 귀먹바위(=농암)을 가르켜 '앞강은 상류의 물살과 합쳐 물소리가 서로 향응하여 사람들의 귀를 막아' 유래한 이름이라고 설명하였다.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구나
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
바위 앞 저 산 저 언덕 어제 본 듯 하여라
<농암의 치사한정가>
-농암 종택에 대하여-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원래 종택이 있던 분천마을이 수몰되었다.
안동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이건(移建)되어 있던 종택과 사당, 긍구당(肯構堂)을
영천이씨 문중의 종손 이성원이 한곳으로 옮겨 놓았다. 2007년에 분강서원(汾江書院)이 재이건되었다.
지금은 분강촌(汾江村)이라고도 불리며,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삼밭회는 한산이씨 일가 모임이다.
아들은 물론 딸과 며느리 사위, 친가와 외가, 친손은 물론 외손들도 함께 모여
1년에 한번 정담을 나누고 있다.
올해 장소는 농암종택이다.
도착하자마자 고택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병풍처럼 둘러선 산이었다.

그 뜰에는 벌써 아이들이 모여 무언가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아이들은 귤 박스를 보자마자 비웠다. ^^

귤을 까먹는 아이들의 뒤를 돌아가보면
가을을 마중나온 코스모스가 피어있다.

9월은 가을이다.

벌써 어스름한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농암종택에서 제공한 맛있는 저녁식사이다.
한 끼에 6천원이다.

어두워서 잘 안나왔지만... 본채의 전경이다.

모두 함께모여 자기 소개를 하고 있다.

삼밭회 회장님의 말씀이다.

어른들이 말씀하시는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경청하는 기특한 아이들..........

화장실도 편리하게 같이 붙어 있다.

자기 소개 시간을 마치고
가야금 연주와 우리노래 부르기 시간이 이어졌다.
농암종택측에서 제공하며 숙박료에 포함이 되어 있다.

재미있는 설명이 이어지고

진도아리랑을 따라하기도 했다.

그는 시인이었다.

그리고 선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영천이씨 집안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을 새겨놓은 것이라 한다.

마당에서는 여러 종류의 술과 맛있는 고기가 차려지고

정읍 산외 쇠고기의 맛에 모두들 이성을 잃었다.

고기는 굽는 대로 빛의 속도로 없어지고

체면이고 뭐고 포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강호의 삶의 노래했던 농암종택에서 어울리지 않게 우린
저녁 먹고도 그 많은 쇠고기를 먹어치우느라 행복했다.
맛있고 풍부한 먹거리와 좋은 숙소와 식사를 제공해 주신
모든 이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밤이라 사진이 엉망이어서 죄송...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예쁜 두 어린이가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그 곁을 떠나지도 못했다.

한편 안채에서는 내년 모임에 대한 어른들의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아이가 지키는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맞추셨나요?

여전히 못 떠나는 꼬마들

긍구당이 보인다. 이현보 선생님이 태어나고 자란 곳.

안동댐으로 수몰될 뻔한 굴뚝까지도 이 곳에 옮겨왔다.

누군가는 꼭 지키고 있다. 무언가를...

드디어 손 끝에 보인다.

이 아이들이 만지려고 하는 것은 바로 메뚜기였다.
메뚜기는 도망가지도 않고 아이들과 한참 놀아주었다.

아침 안개가 내려앉은 농암 종택의 전경

아직도 방안에선 이야기 중.

모두 함께 진지하게 담소를 나누고

가끔 쑥스러운 새색시의 웃음도 지으며

함께 할 수 있어서 즐거우며

곧이은 결혼식에 금방 새신랑 새신부 타이틀을 벗은
또다른 한쌍의 신혼부부도 동석했으며

편안한 표정에서 그날의 느낌을 알 수 있다.

왜 하늘을 보고 있을까?

배드민턴라켓이 보인다.

사촌끼리의 게임

파울인데 내가 받아준다.

가을을 재촉하는 밤송이

농암종택은 이와 같이 감입곡류천의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다.
래프팅하기엔 최적의 장소이다.

멀리서 잡은 농암종택

청량산에서 흘러나온 물은 낙동강으로 달리고 있다.

운 좋으면 무지개도 볼 수 있다.

강물이 흐르는 중에 산이 융기하면 강은 아래쪽으로 더욱 침식하게 되면서
골짜기와 골짜기를 흐르는 감입곡류하천이 형성된다.

단층을 보라. 산이 융기하면서 산의 뱃속이 드러났다.

가송리인데 아름다운 소나무보다
먹음직스러운 사과가 더 눈에 들어왔다.

이 곳에서는 누구라도 강호의 풍류에 젖고 싶을 것 같다.

이어서 발길을 돌린 곳은 한국국학진흥원이다.
이름이 거창한데
조선 시대의 성리학=국학이라고 자칭한 것이다.
위의 사진은 군자의 상징인 매난국죽을 새긴 돌인데
가까이서보면
물이 분수처럼 표면을 흘러내리고 있다.
국학진흥원은 고리타분한 고서 몇권을 전시한 곳이 아니다.
조선의 성리학을
현대식 기법으로 세련되고 재미있게 전시하고 있다.
홀로그램, 애니메이션, 움직이는 화면 등...
안동이 왜 양반유교문화의 고장인지를
시간가는지 모르고 배울 수 있는 곳이다.
놓치신 분들은 설명하시는 분을 모시고
언젠가는 국학원을 둘러보시길.

국비와 지방비를 들여 지은 국학진흥원은
100~700년전으로 여행하기에 손색이 없다.

이 문서는 조선 전기의 것이기 때문에
자손에게 재산을 분배함에 있어
딸과 아들에 골고루 나누어주고 있다.
남성위주, 장자위주의 성리학이 뿌리내린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어서
조선전기만 해도 남녀균분상속을 하였다.

바로 이것이 분깃문기이다.

약과를 찍는 틀이다. 다남(多男)이라 새겨져 있다.
아들을 낳아야 나의 제사를 지내주고
남의 집에서 여자가 와서 우리 문중을 위해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땐 딸은 낳을 수록 손해이며 아들은 낳을 수록 로또였다.

친영제도는 한마디로 여자가 남자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사는 것이다.
본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결혼 풍습은 장가가는 것이다.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처럼
여자의 집에서 남자가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살았다.
이율곡도 다 자랄 때까지 오죽헌에서 외가식구들과 함께 자랐다.
신사임당은 결혼 후 20년이 지나서야 시집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임진왜란 직전까지 살았던 이율곡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조선 중기까지 우리나라의 전통 혼인 풍습은
결혼하자마자 시집가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보다 한참 전인 세종은 조선초부터
중국의 친영제도를 백성들에게 보급시키기 위해
본인이 솔선수범하여 친영으로 결혼을 하였으며
이후 사대부와 백성들에게 친영을 강요하였으나
정착시키는데 실패하였다.
사림파가 권력을 잡은 조선 후기 이후
친영제도가 우리 나라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또한 남자집안을 위주로 여자들이 시집와 살게 되면서
동족촌이 형성되어
한 마을에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살게 된다.
조선 중기까지는 다른 성을 가진 사람들이
한 마을에 다양하게 어우러져 살았다.
국학진흥원에는 이와 같은 친영제도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나와있다.
원래 여자가 시집가는 풍습은 중국의 풍습이라고 쓰여 있다.

인간 문화재가 수놓은 병풍이다.

자세히 보면
과거를 치르는 모습도 있다.
실력 좋은 사람 옆에 앉아서 시험 치르기 등
옛날 과거에서도 비리는 있었다.

조선 시대의 주민등록증이다.
한 사람의 것인데(이기동)
그 사람의 신분에 따라 호패의 크기와 두께가 달라짐을 알 수 있다.


목어이다. 제사지낼 때 진짜 생선대신 놓아두던 것이다.

서당의 풍습이다.
사판이라 하여 종이를 아끼기 위하여...
모래에 글을 쓰고 있다.

실제 TV진품명품쇼에 나왔던 작품이다.
판정가 1억4천만원이라 한다.
조선 시대 계원들의 명단과 그 모습을 그린 것인데
그 프로그램에서 여기적힌 사람들의 후손을 찾았는데
모두 찾았다고 한다.

공부는 어렵다.
예전에는 한문공부한다고 우리나라 두뇌들이 전력을 기울였다면
요즘은 영어공부한다고 온 나라가 들섞인다.
경서통이다.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머리에 꽂는 어사화이다.

그림에서 어사화는 둥그렇게 기울어져 있다.
어사화의 끝에 실을 매달아 입에 물어서 기울어지는 것인데
과거에 급제한 만큼 과묵해지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것은 장원급제 답안지이다.(이만도 장원급제 홍패와 시권)
이만도 선생님의 것이다.
이만도 선생님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그날로 단식에 들어가
24일만에 사망하게 된다.
그의 며느리 역시 3.1운동에 참가하여 온갖 고초를 겪게 된다.
마을의 어른이 앞장서서 단식하는 것을 보면서 안동은 어느 지역보다 혁신적이 된다.
안동의 양반과 백성들은
전국 최고의 독립운동가 배출 지역이 된다.
안동의 양반들은 토지와 가산을 모두 팔아 독립 운동 자금을 마련하여
만주로 떠났으며
안동양반들 중의 일부는 임시정부의 핵심요인,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가 되기까지 하였다. (이 부분은 작년 여름에 올린 여행기에 나온다.)

유교 양반 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을 미니어처로 만든 것이다.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서 신하들이 들고 있던 것이다.
원래 나무로 만들어 임금에게 보고할 것 혹은 임금의 말씀받아 적는 용도로 사용하였는데
나중에는 의례용으로 바뀌었다.
위에 전시된 것은
중국 신종에게서 하사받은 상아로 만든 홀이라 한다.
이러한 유물이 안동에서 기증된 것을 보면
조선건국에 비협조적이었던 사림파가
조선후기에서는 강력한 지배권력으로 훈구파를 대신해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4번의 사화는 성리학의 완전한 실현을 위한 사림파의 혁명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안동의 양반집에서 나온 툇마루의 아랫면이다.
(길이가 사람 키 보다 더 길다.)
위에는 그냥 마루이지만
툇마루 밑을 보면 글자와 그림이 새겨져 있다.
즉 인쇄판각본을 툇마루로 보관하였던 것이다.
통풍도 잘되고 툇마루 역할도 하게끔 조상의 지혜가 발휘된 것이다.

위의 시커먼 툇마루 아랫면을 인쇄하면
이렇게 우리나라 역사가 한 눈에 드러난다.
우리나라(초록색), 중국(왼쪽 노란색), 북방 유목민족(검은색 왼쪽 상단), 일본(오른쪽 중간)의 계보와 역사를 판각해 놓았다.
우리나라 역사의 시발점인 단군을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시대에 배열해 놓았고
저자가 살았던 안동과 풍산지역의 연혁도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천하의 역사에서 자기가 사는 고장의 역사까지
한 눈에 세계사를 공부할 수 있게 만든 교재이다.
이 곳에는 5만여점의 인쇄판각본이 보관되어 있다.
한산이씨의 문집판각본도 있다고 한다.
10만여점을 채우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신청한다고 한다.
(8만대장경보다 더 많은 숫자)

국학진흥원은 끝없이 상향하는 건물구조이다.
끝나고 내려갈 때는 산을 하산하는 느낌이다.

국학진흥원을 가봤다면
안동독립기념관을 가보라.
작년도 글을 보면
안동 양반에 대하여 새롭게 느낄 것이다.
극비사항^^
노래자랑도 동영상으로 촬영해 두었다.
아래를 클릭해보라.
http://ezhistory.org/zbxe/ucc/8132
Powered by XE
문경이 이렇게 유식한 줄 몰랐네. 역시 국사선생님